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연아 시인 / 흰 당나귀의 침대로 돌아오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9.

김연아 시인 / 흰 당나귀의 침대로 돌아오라

 

 

                               내 꿈엔 한 남자가 있고 그는 투명인간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었다

 

 

  1. 죽은 시인 K에게

 

  내 방은 목쉰 별들의 외침으로 가득하다

  여기에는 검은 바다의 추위와

  생선 냄새가 배어 있는 더러운 벽들이 있다

  부서진 계단과 소리를 삼키는 문들이 있다

 

  밀랍 인형처럼 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발자국과 함께 떠내려가는 사람들

  무덤을 끌고 가는 붉은 강물은 조난자처럼 현관을 두드린다

 

  익사한 자동차들이 경적도 없이 떨 때

  나의 목청이 손가락을 끌어당기며 음성을 가다듬을 때

  당신은 묻겠지?

  모든 소리가 순례하는 흰 당나귀의 귀는 어디에 있냐고

  날개의 새로운 작동법은 어디에 있냐고

 

  내가 아는 것은

  쓸쓸하고 우아한 비극기계인 시인들

  무성하게 하늘로 뻗친 달팽이의 손들

  길 밖으로 나온 화장대는

  진흙으로 돌아가는 얼굴들을 보여준다

  구멍 난 천장에서 녹색 술병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냄새가 내 침대를 가로지른다

 

  나의 머리맡에는 흰 당나귀가 잠들어 있다

  황갈색 늪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시여, 당신은 어떤 절박함을 노래할 것인가?

 

  지평선을 버리고 흰 당나귀 눈을 가진 자여

  당신의 입술 위에 놓인 달의 눈물을 들어올리고

  시인이여, 이제 당신의 이름을 말할 때가 왔다

 

  당신은 이미 한 사람이 아니고 이곳의 시공을 초월했다

  말을 육체로 변화시키는 수태고지는 어디에 있나?

  말이 행위가 되는 시는 어디에 있나?

 

  비가 밤새도록 작업한 지도 위에는 도시의 새로운 설계도

  부주의한 식자공의 오자 같은

  진흙에 반쯤 잠긴 배 같은 나의 침대

 

  나는 안다 내 침대가 짐승의 숨소리를 내는 것을

  어둠 속에서 태어나는 부드러운 흰빛 귀

  당나귀의 귓불엔 소리의 그림자들이 매달려 있고

  나의 이마엔 깃털의 부드러움이 스며 있다

 

  나는 뒤척이고 또 뒤척이며 소리를 향해 표류해간다

  최종 목적지는 알지 못한 채,

  새의 깃털은 지극한 말의 언덕을 향해 날아갔다

  팔락쉬, 팔락쉬*, 날개를 떨며

 

  녹색 공기를 탐하는 앵무새는 아직 새장 속에 있고

  열쇠는 죽은 미망인의 주머니 속에 있다

  그리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2. 흰 당나귀의 그림자 극장

 

  모든 생명은 소리를 낸다, 죽어 있는 것마저도

 

  그것은 일요일

  한낮의 등화관제같이 고요한 바다 속 소음

  당신은 무언극의 배우처럼 하얀 점토로 빚어진 얼굴

  숨을 내쉴 때마다 목관악기 소리를 낸다

 

  이 무대에는 어떠한 청중도 없는데

  나의 귀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당신의 날개는 빛이 나고 약간의 불안이 배어 있다

 

  여기는 말과 그림자의 이중혼례가 이뤄지는

  언더그라운드 무대

  흰 당나귀가 있는 그림자 극장, 이라고 말해두자

 

  잘못 사용한 이국의 단어처럼

  나의 문 앞에 놓인 두 개의 길

  우선 천사들이 왔고 다음으로 당나귀가 도착했다

 

  반은 천사여서 반만 살아 있다고 믿는 자

  물푸레나무와 밤의 호흡에 맞춰 노래하는 자

  달 아래 부푸는 씨앗의 입김을 느끼는 자

  향유를 바르고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바치는 자

 

  이 다국적 그림자들이 어떻게 육체를 얻는지

  그들의 대사가 어느 나라 언어로 진행되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

 

  모든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맹금의 눈을 가진 자여,

  날개 아래 시를 사육하는 자여,

  나의 제단은 플루토의 외침을 동반하고

  허무의 냄새 속에 있다

  쓰러진 사내를 안은 방탕한 아가씨의 무릎처럼

 

  때에 묻어 반질하고 모서리가 해진 검은 노트

  종이 위에 불타며 비로소 드러나는 글자들

  이 세상에 위장 취업한 그림자들은 모든 인칭에 서식한다

 

  내 눈꺼풀 뒤에 어떤 통로가 있는 걸까?

  (나를 묶는 괄호는 열려 있고

  나는 그림자들과 공생생물이 되었다

  (나는 나를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보는 것 같았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도시에 홀로 남겨진

  안개 속에 흰 당나귀가 떠 있다

  당나귀 말로 시를 낭송하거나 당신의 마음을 하프처럼 켜면서

  아파트의 창들은 움푹 꺼진 검은 눈을 하고 있다

  마치 깨어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처럼

 

* 팔락쉬 : 첼란의 글에서 재인용. 「그렇다, 아니다」를 동시에 의미한다.

 

월간 『현대시학』 2012년 2월호 발표

 

 


 

 

김연아 시인 / 검은 고독, 흰 고독

 —변기의 말

 

 

  그녀는 검은 올리브 같은 열매를 한 알씩

  내 입으로 떨어뜨렸다

  죽은 물고기와 재스민 냄새가 내 얼굴에 스민다

 

  오라, 오라, 나는 노래하는 변기

  내 목구멍은 회전문처럼 열리고 닫힌다

  당신은 땅의 자궁에 부어질 것이다

 

  아니, 나는 변기가 아니고, 오그라든 자궁이 아니다

  이곳은 고해가 행해지는 신성한 화장실

  당신은 눈물과 잉크로 가득 찬 가방

  장엄한 보리수 아래 앉듯

  이 비어 있는 왕좌에 앉으시라

 

  흰 고독 위에 앉은 검은 고독, 당신은 깨끗이 정화될 것이다

 

  고행자도 끌어안고 걸인도 끌어안고

  즐거운 배설물이 담긴 황홀한 반죽통,

  내 목구멍으로 당신의 피가 흘러갔다

  당신의 심장에선 아직도 잉크가 새고 있나?

 

  몸을 비울수록 비워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눈물로 가득 찬 목구멍

  뱃속에서 부화시킨 새끼를 입으로 낳는

  이브검은쇠숲개구리처럼, 당신의 입은 둥근 자궁

 

  이것은 하늘을 향해 열린 동굴, 밤으로 통하는 입구

  나의 길은 하느님의 창자보다 더 길고

  모든 노선은 나를 통하게 되어 있다

  고백과 예언이 뒤섞이는 밤,

 

  나의 길은 당신이 낳은 미로를 끌고 멀리 가는 것이다

  눈물 흘리는 아이들의 옹알거림처럼

  이미 씌어진 것들을 지우기 위해

  당신의 조율에서 멀리, 잘 닦여진 메모로부터 멀리

 

  나는 인간의 연대기를 간직하고 거대한 속삭임을 듣는 자

  당신이 동물을 먹고 산 채로 동물을 묻는 동안

  귀머거리가 벙어리에게 귀 기울이는 동안

 

  나는 씌어진다 흰 고독 위의 검은 고독으로

  혹등고래처럼 엎드려 자기 별자리를 향해 가는 나는

  잠이 없는 어두운 동물이다

 

월간 『현대시학』 2012년 2월호 발표

 

 


 

김연아 시인

함양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200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