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철 시인 / 밥 먹는 풍경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갈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03년 가을호 발표
안주철 시인 / 다음 생에 할 일들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혀를 잘라버려야 해 저걸 저 저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 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안 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계간 『작가들』 2013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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