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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주철 시인 / 밥 먹는 풍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9.

안주철 시인 / 밥 먹는 풍경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갈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03년 가을호 발표

 

 


 

 

안주철 시인 / 다음 생에 할 일들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혀를 잘라버려야 해 저걸 저 저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 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안 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계간 『작가들』 2013년 여름호 발표

 

 


 

안주철 시인

197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200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배재대 국문학과 졸업.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