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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미 시인 / 컵의 회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9.

손미 시인 / 컵의 회화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양파 공동체』(민음사,2013) 중에서

 

 


 

 

손미 시인 / 책상

 

 

  책상다리를 끌고 왔어

  웅크리고 앉아 흰 과일을 빗질하는 밤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책상이 걸어 와

  내 귀퉁이를 핥는다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

  나를 읽는

  책상 이빨

  내 몸에서 과즙이 흘러 우리는

  맨 몸으로 뒤엉킨다

 

  네 위에 엎드리면

  우리는 하나 또는 둘이었지

 

  나무 책상과 내가 응시한다

 

  딱딱한 다리를 끌고

  우리는 같은 곳에서 온 것

  같다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양파 공동체』(민음사,2013) 중에서

 

 


 

손미 (孫美) 시인

1982년 대전에서 출생. 2009년 《문학사상》 상반기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양파 공동체』(민음사,2013)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