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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변영로 시인 / 오, 솟는 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4.

변영로 시인 / 오, 솟는 해

 

 

오, 솟는 해, 퍼지는 해, 기우는 해

하눌 길 걷는 너의 거름 빠르고도 느리다.

 

해야 물어 보자, 너의 거름 재임은

한 복판[中天]에 계옵신 님 만나 뵈렴인가?

 

해야, 물어보자, 너의 거름 느림은

만나자 이별하기 마음이 무거워서인가?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변영로 시인 / 이월(二月) 햇발

 

 

가녈프게 가녈프게 퍼지는 이월(二月) 햇빛은

어느 딴 세상에서 나리는 그늘 같은데

 

오는 봄의 머­ㄴ 치마자락 끄는 소리는

가려는 `찬손님'의 무거운 신 끄는 소리인가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변영로 시인 / 추억(追憶)만이

 

 

모든 `현실(現實)'은 영원(永遠)히

 

아이삐[藤]의 그늘로 가리워져라

 

그리하여 이슬 같은 추억(追憶)만이

 

그의 슬픈 광영(光榮) 가운데서 혼절(昏絶)케 하여라.

 

생(生)이란 그윽하고 먼 기억과 기억과의 연쇄(連鎖)인 것뿐.

그리하여 `이론(理論)'과 `사실(事實)'의 횃불이

우리에게 쏘일 제, 우리는 움치러진다―

헷빛에 내치여진 올빼미 모양으로……

 

그럼으로 환상(幻像)을 더 분명(分明)히 보려고

우리는 눈을 곱게 감는 것이 아니냐?

석모(夕暮)의 찬연(燦然)한 광영(光榮) 가운데서는

우리는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느냐?

 

아, 모든 `현실(現實)'은 영원(永遠)히!

보라빛 금(金)빛의 얇은 깁으로 가리워저라

그리하여 아렴풋한 추억(追憶)만이

곱게 그윽하게 살게 하여라!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변영로 시인 / 친애하는 벗이여

 

 

친애하는 벗이여!

왜 잔소리를 하는가―

영혼을 가난케 하는 잔소리를?

기어코 잔소리를 하려거든

자갯돌 우를 흐르는 시내물같이

잔소리를 하여라.

 

친애하는 벗이여!

왜 그다지도 신음하는가―

마음을 어둡게 하는 신음을?

기어코 신음을 하려거든

바람에 휩쓸리는 삼림같이

신음하여라.

 

친애하는 벗이여!

왜 비웃는 것같이 웃는가―

초생달빛같이 엷은 웃음을?

반드시 한번 웃으려거든

가없는 바다 위에 햇빛같은

넓은 웃음을 웃어라!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변영로 시인 / 하늘만 보아라

 

 

벗이여, 바다를 내다보지 말아라―

발가벗은 어여쁜 색씨님네

`죽음으로 꼬이는 노래' 부른다.

다만 `쁘가슈나'이 젖같이 흐르는

멀고 깊고 푸른 하늘만 보아라.

 

벗이여, 숲 속을 기웃대지 말아라

간사스런 작은 사람들이

낯선 곳에서 너의 발자취 어지럽게 할라.

다만 `쁘가슈나'이 젖같이 흐르는

멀고 깊고 푸른 하늘만 보아라

 

조선의 마음, 평문관, 1924

 

 


 

변영로 [卞榮魯, 1897.5.9 ~ 1961.3.14] 시인

1898년 서울에서 출생. 아호는 수주(樹州). 시인이며 수필가와 ·영문학자로 활동. 시집으로 『조선의 마음』,『수주 시문선』, 영시집『진달래 동산』이 있음. 이화여전·성균관대 교,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초대 회장, 동아일보 기자·대한공론사 이사장 등을 역임. 서울시 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