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파도 소리 헤치고
꽃 바다 깃발 바다 파도 소리 헤치고 밀물쳐 들어온다 티끌 쓴 기동부대 해방의 병사들이 오만한 요새선과 철조망 실색(失色)한 포로 꺾어진 총칼더미 박차 흩으며
잃어버렸던 조국의 아침이다 눈물 걷고 쳐다보아라 형제들아 산맥과 거리와 마을마다 독사처럼 서렸던 사슬도 돌벽도 쇠창살도 민족의 핏줄에 깊이 박혔던 표독한 이빨도 발톱도 갑갑하던 화약 연기와 함께 하루 아침 스러졌다 화려한 아침 고대하던 태양이다
하늘가에서 먼 나라에서 옥중에서 채찍 아래서 창 끝에서 이름 없는 전장(戰場)에서 눈감지 못한 채 꺼꾸러진 형제들 인제야 모두 한 번씩만이라도 얼굴 돌려 뚫어진 안공(眼孔)에 비추는 풀리운 조국의 일어서는 모양 바라보라 악물린 이빨 벌려 웃어보라
피 엉킨 구절 구절 떨리는 글장 삐뚤어진 역사의 여울물 소리 아세아의 밤중에 사무친 지 몇몇 해냐 잠겼던 바다 바다 오늘은 침략의 흡반이 아닌 항구마다 해방하는 함대 자유의 병사들이 들어온다 노랫소리 파도소리 목메인 만세소리 헤치며
거리 거리 마을마다 부두마다 꽃 바다 깃발 바다 만백성 흐렸던 마음에 떠오르는 다시 돌아온 그립던 모습 웃음 띄우는 조국의 얼굴아 아청빛 비단폭에 감아 새 시대의 길 앞에 받들어 올리는 꽃묶음 하나 정초히 나부낀다
새노래, 아문각, 1948
김기림 시인 / 파선(破船)
달이 있고 항구(港口)에 불빛이 멀고 축대(築臺) 허리에 물결 소리 점잖건만 나는 도무지 시인(詩人)의 흉내를 낼 수도 없고 `빠이론'과 같이 짖을 수도 없고 갈매기와 같이 슬퍼질 수는 더욱 없어 상(傷)한 바위 틈에 파선(破船)과 같이 참담(慘憺)하다. 차라리 노점(露店)에서 임금(林檎)을 사서 와락와락 껍질을 벗긴다.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폭풍경보(暴風警報)
동북(東北)― 1만 8천 킬로 미돌(米突)의 지점― 폭풍이다. 사나운 먼지와 불길을 차 일으키며 폭풍을 뚫고 나가는 산병선(散兵線).
살과 살의 부딪침 번쩍이는 불꽃― 군중의 꿈틀거림―외침. 투닥 탁 탁 `저 병정 정신 차려라. 총알이 너의 귀밑 3인치의 공간을 날지 않니?' 아세아의 지도는 전율한다.
투닥 탁 탁 으아―ㅇ 앙 르르르르르르르 타당 탕―
`평화올시다. 평화올시다' 예, 라우드 스피―커를 부는 자식은 누구냐? 미친 소리. 제네바의 신사는 거짓말쟁이다. 너는 발칸의 옛날을 잊어버렸느냐? 홀룸바이트의 상공에서 피에 젖은 구름장이 떠돈다. 또 저기― 사막을 짓밟는 대몽고의 진군을 보아라.
동북(東北)― 1만 8천 킬로 미돌(米突)의 지점― 또 폭풍이다 폭풍이다.
투닥 탁 탁 이 병정 정신차려라
용의―돌격
신동아, 193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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