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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기림 시인 / 지혜에게 바치는 노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6.

김기림 시인 / 지혜에게 바치는 노래

 

 

검은 기관차 차머리마다

장미꽃 쏟아지게 피워서

쪽빛 바닷바람 함북 안겨

비단폭 구름장 휘감아보내마

숨쉬는 강철 꿈을 아는 동물아

 

황량한 `근대'의 남은 터에 쓰러져

병들어 이즈러져 반신(半身)이 피에 젖은

헬라쓰의 오래인 후예․이 방탕한 세기(世紀)의 아름소리 들으렴

자못 길들이기 어려운 짐승이더니

지혜의 속삭임에 오늘은 점잖이 기죽였고나

 

풀냄새 싱싱한 산맥을 새어

흰 물결 선을 두른 뭇 대륙의 가장자리 돌아

간 데마다 암묵(暗黙)과 행복(幸福)만이 사는 아롱진 도시

비취빛 하늘 밑 꽃밭 속의 공장에서는

기계와 피대(皮帶)가 악기처럼 울려 오리

 

시간과 공간이 아득하게 맞대인 곳

거기서는 무한은 벌써 한낱 어휘가 아니고

주민들의 한이 서린 미각이리라

얽히고 설킨 태양계의 수식의 그물에 걸린

날랜 타원형 하나―새로운 별의 탄생이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초승달은 소제부(掃除夫)

 

 

오늘밤도 초승달은

산호로 짠 신을 끌고

노을의 키―를 밟고 내려옵니다

구름의 층층대는 바다와 같이

유랑한 손풍금이라오

 

어서 오시오 정다운 소제부(掃除夫)―

 

그래서 그는 온종일 내 가슴의 하상(河床)에 가라앉은

문명의 엔진에서 부스러진 티끌들을

말숙하게 쓸어 주오

 

그러고는 나에게 명령하오

그가 좋아하는 시(詩)를 써 보라고―

(요곤 주제넘게 시(詩)를 꽤 안다)

 

그러면 그와 나 손을 마주잡고

바닷가로 내려갑니다

피곤할 줄 모르는 무도광인 지구에게

우리의 시(詩)를 들려주러

 

도금 칠한 팔뚝시계 대신에

장미의 이야기를 팔아 버린 겁 모르는 말괄량이에게

고향의 노래를 들려 주러―

 

문학, 1934. 1

 

 


 

 

김기림 시인 / 추억(追憶)

 

 

종다리 뜨는 아침 언덕 위에 구름을 쫓아 달리던

    너와 나는 그날 꿈 많은 소년(少年)이었다.

제비 같은 이야기는 바다 건너로만 날리었고

    가벼운 날개 밑에 머-ㄹ리 수평선(水平線)이 층계(層階)처럼 낮더라.

 

자주 투기는 팔매는 바다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히고

지칠줄 모르는 마음은 단애(斷崖)의 허리에

    게으른 갈매기 울음소리를 비웃었다

 

오늘 얼음처럼 싸늘한 노을이 뜨는 바다의 언덕을 오르는

    두 놈의 봉해진 입술에는 바다 건너 이야기가 없고.

 

곰팽이처럼 얼룩진 수염이 코밑에 미운 너와 나는

    또다시 가슴이 둥근 소년(少年)일 수 없구나.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파도(波濤)

 

 

좀먹는 왕궁의 기둥 뿌리를 흔들며

월가(街) 하늘 닿는 집들을 휘돌아

배미는 문짝을 제끼며 창살을 비틀며

향기와 같이

조수와 같이

음악과 같이

바람과 같이

구름과 같이

모―든 그런 것들의 파도인 것처럼

아― 새 세계는 다닥쳐 오는구나

 

이름 지을 수 없으면서도

그러나

항거할 수도 없이

확실하게

뚜렷하게

 

아―무 타협도 여유도

허락지 않으면서

시시

각각으로

모양을 갖추면서 다가오는 것

아― 파도여 너는 온 지평선을 골고루 퍼져 오는구나

 

어둠침침한 산협(山峽)을 지나 낭떨어진 벼래를 스쳐 들을 건너

개나리

버찌

진달래

나리 창포꽃 일일이 삼켜 가며 여러 밤과 밤

쏟아지는 별빛을 녹여 담아 가지고

강(江)은 지금 둥그렇게 굽이치며 파도쳐 온다

여러 육지와 바다 뒤덮으며 휘몰려 온다

 

벌써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너나 나나

출렁이는 파도의 지나가는 파문일 뿐

얽히고 설킨 파동의 이 굽이 저 굽이일 뿐

 

아― 지금

파도는 굴러온다

무너진다

쓰러진다

떼민다

박찬다

딩구나 보다

 

호탕한 범람 속에

모―든 우리들의 어저께를 파묻자

찢어진 기억을 쓸어 보내자

지금 파도를 막을 이 없다

 

그는 아무의 앞에서도 서슴지 않는다

파도는

내일의 지평선을

주름잡으며

항거할 수 없이

점점

다가올 뿐이다

 

새노래, 아문각, 1948

 

 


 

김기림[金起林, 1908. 5.11 ~?]시인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출생.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대학을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영어영문과 졸업. 193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 1. 23) · 〈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學燈 창간호, 1931. 10.) ∙ 〈고대(苦待)〉(新東亞 창간호, 1931. 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주지주의에 관한 단상(斷想)인〈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 1. 27.)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  문학 활동은 九人會(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적으로 남아 있음.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창자고가 비평에서 두루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다소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도 했음.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됨. 대표 저서로는 시집으로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고,  비평 및 이론서로『문학개론』, 『시론』, 『시의 이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