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지혜에게 바치는 노래
검은 기관차 차머리마다 장미꽃 쏟아지게 피워서 쪽빛 바닷바람 함북 안겨 비단폭 구름장 휘감아보내마 숨쉬는 강철 꿈을 아는 동물아
황량한 `근대'의 남은 터에 쓰러져 병들어 이즈러져 반신(半身)이 피에 젖은 헬라쓰의 오래인 후예․이 방탕한 세기(世紀)의 아름소리 들으렴 자못 길들이기 어려운 짐승이더니 지혜의 속삭임에 오늘은 점잖이 기죽였고나
풀냄새 싱싱한 산맥을 새어 흰 물결 선을 두른 뭇 대륙의 가장자리 돌아 간 데마다 암묵(暗黙)과 행복(幸福)만이 사는 아롱진 도시 비취빛 하늘 밑 꽃밭 속의 공장에서는 기계와 피대(皮帶)가 악기처럼 울려 오리
시간과 공간이 아득하게 맞대인 곳 거기서는 무한은 벌써 한낱 어휘가 아니고 주민들의 한이 서린 미각이리라 얽히고 설킨 태양계의 수식의 그물에 걸린 날랜 타원형 하나―새로운 별의 탄생이다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초승달은 소제부(掃除夫)
오늘밤도 초승달은 산호로 짠 신을 끌고 노을의 키―를 밟고 내려옵니다 구름의 층층대는 바다와 같이 유랑한 손풍금이라오
어서 오시오 정다운 소제부(掃除夫)―
그래서 그는 온종일 내 가슴의 하상(河床)에 가라앉은 문명의 엔진에서 부스러진 티끌들을 말숙하게 쓸어 주오
그러고는 나에게 명령하오 그가 좋아하는 시(詩)를 써 보라고― (요곤 주제넘게 시(詩)를 꽤 안다)
그러면 그와 나 손을 마주잡고 바닷가로 내려갑니다 피곤할 줄 모르는 무도광인 지구에게 우리의 시(詩)를 들려주러
도금 칠한 팔뚝시계 대신에 장미의 이야기를 팔아 버린 겁 모르는 말괄량이에게 고향의 노래를 들려 주러―
문학, 1934. 1
김기림 시인 / 추억(追憶)
종다리 뜨는 아침 언덕 위에 구름을 쫓아 달리던 너와 나는 그날 꿈 많은 소년(少年)이었다. 제비 같은 이야기는 바다 건너로만 날리었고 가벼운 날개 밑에 머-ㄹ리 수평선(水平線)이 층계(層階)처럼 낮더라.
자주 투기는 팔매는 바다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히고 지칠줄 모르는 마음은 단애(斷崖)의 허리에 게으른 갈매기 울음소리를 비웃었다
오늘 얼음처럼 싸늘한 노을이 뜨는 바다의 언덕을 오르는 두 놈의 봉해진 입술에는 바다 건너 이야기가 없고.
곰팽이처럼 얼룩진 수염이 코밑에 미운 너와 나는 또다시 가슴이 둥근 소년(少年)일 수 없구나.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김기림 시인 / 파도(波濤)
좀먹는 왕궁의 기둥 뿌리를 흔들며 월가(街) 하늘 닿는 집들을 휘돌아 배미는 문짝을 제끼며 창살을 비틀며 향기와 같이 조수와 같이 음악과 같이 바람과 같이 또 구름과 같이 모―든 그런 것들의 파도인 것처럼 아― 새 세계는 다닥쳐 오는구나
이름 지을 수 없으면서도 그러나 항거할 수도 없이 확실하게 뚜렷하게
아―무 타협도 여유도 허락지 않으면서 시시 각각으로 모양을 갖추면서 다가오는 것 아― 파도여 너는 온 지평선을 골고루 퍼져 오는구나
어둠침침한 산협(山峽)을 지나 낭떨어진 벼래를 스쳐 들을 건너 개나리 버찌 진달래 나리 창포꽃 일일이 삼켜 가며 여러 밤과 밤 쏟아지는 별빛을 녹여 담아 가지고 강(江)은 지금 둥그렇게 굽이치며 파도쳐 온다 여러 육지와 바다 뒤덮으며 휘몰려 온다
벌써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너나 나나 출렁이는 파도의 지나가는 파문일 뿐 얽히고 설킨 파동의 이 굽이 저 굽이일 뿐
아― 지금 파도는 굴러온다 무너진다 쓰러진다 떼민다 박찬다 딩구나 보다
이 호탕한 범람 속에 모―든 우리들의 어저께를 파묻자 찢어진 기억을 쓸어 보내자 지금 파도를 막을 이 없다
그는 아무의 앞에서도 서슴지 않는다 파도는 먼 내일의 지평선을 주름잡으며 항거할 수 없이 점점 다가올 뿐이다
새노래, 아문각,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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