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일요일(日曜日) 행진곡(行進曲)
월(月)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하낫 둘 하낫 둘 일요일로 나가는 `엇둘' 소리……
자연의 학대에서 너를 놓아라 역사의 여백…… 영혼의 위생 데이…… 일요일의 들로 바다로……
우리들의 유쾌한 하늘과 하루
일요일 일요일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잠은 나의 배를 밀고
공회당 꼭대기― 시계의 시침은 `12' 위를 분주하게 구르고 갑니다
불을 끕니다 그러면 작은 풍선인 나의 침실은 밤의 부두를 떠나갑니다
피 섞인 눈동자 흘기는 눈자위 칼날 같은 미소 오― 잘 있거라 나의 대낮을 찬란하게 달리던 것들이여
잠은 나의 배를 밀고 지구를 멀리 떠나갑니다
밑 없는 어둠의 물바퀴 속에 물거품처럼 딩구는 지구를 버리고 멀리 멀리 나의 배는 별들의 노래에 이끌리며 푸른 꿈의 바다 위를 드놀며 미끄러져 갑니다
삼천리, 1932. 4
김기림 시인 / 저녁별은 푸른 날개를 흔들며
높은 하늘의 별에 달리는 수도원의 여승들의 염주를 헤이는 소리 소리 소리―
메마른 개천의 잠든 하상(河床)에 돌멩이를 베고 미꾸라지는 `가르랑 가르랑' 텅 빈 창자를 틀어쥔다 천기예보(天氣豫報)에는 아직도 비 이야기가 없다
깊은 공기의 퇴적 아래 자빠진 거리 위를 포도주의 물결이 흐른다 조개의 가벼운 속삭임―
네온싸인처럼 투명한 바다풀의 유혹―바다는 푸르다
사람들은―본능적인 어린 어족(魚族)의 무리들은 그물을 뚫고 시든 심장을 들고 바다의 써늘한 바람으로 뛰어 나온다
꿈의 조약돌을 담은 빠스켓을 들고 푸른 날개를 흔들며 천사와 같이 삘딩의 우울한 지붕 위를 나려오는 초저녁별―
어서 와요 푸른 천사여 나의 꿈은 지금 나의 차디찬 침실에서 시들었습니다 거꾸러진 나의 화병에 당신의 장미의 꿈을 피우려 아니 옵니까―
조선일보, 1930. 12. 14
김기림 시인 / 제야(除夜)
광화문 네거리에 눈이 오신다 꾸겨진 중절모가 산고모(山高帽)가 베레가 조바위가 사각모가 샷포가 모자 모자 모자가 중대가리 고치머리가 흘러간다.
거지 아이들이 감기의 위험을 열거한 노랑빛 독한 광고지를 군축호외(軍縮號外)와 함께 뿌리고 갔다.
전차들이 주린 상어처럼 살기 띤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찾아 안개의 해저로 모여든다. 군축(軍縮)이 될 리 있나? 그런 건 목사님조차도 믿지 않는다더라.
마스크를 걸고도 국민들은 감기가 무서워서 산소흡입기(酸素吸入器)를 휴대하고 다닌다. 언제부터 이 평온(平穩)에 우리는 이다지 특대생(特待生)처럼 익숙해 버렸을까?
영화의 역사가 이야기처럼 먼 어느 종족의 한 쪼각 부스러기는 조고만한 추문에조차 쥐처럼 비겁하다. 나의 외투는 어느새 껍질처럼 내 몸에 피어났구나. 크지도 적지도 않고 신기하게두 꼭 맞는다.
시민들은 가족을 위하여 바삐바삐 데파―트로 달린다 (그 영광스러운 유전을 지키기 위하여……) 애정의 뇌옥(牢獄) 속에서 나는 언제까지도 얌전한 포로냐? 아내들아 이 달지도 못한 애정의 찌꺼기를 누가 목숨을 내놓고 아끼라고 배워 주더냐? 우리는 조만간 이 기름진 보약을 구토해 버리자.
아들들아 여기에 준비된 것은 어여쁜 곡예사의 교양이다. 나는 차라리 너를 들에 놓아 보내서 사자의 울음을 배우게 하고 싶다.
컴컴한 골목에서 우리는 또 차디찬 손목을 쥐었다 놓을 게다. 그리고 뉘우침과 한탄으로 더럽혀진 간사한 1년의 옷을 찢고 피 묻은 몸뚱아리를 쏘아 보아야 할 게다.
전쟁의 요란 소리도 기적 소리도 들에 멀다. 그 무슨 감격으로써 나에게 카렌다를 바꾸어 달라고 명(命)하는 바치칸의 종(鐘)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광화문 네거리에 눈이 오신다. 별이 어둡다. 몬셀경의 연설을 짓밟고 눈을 차고 죄(罪) 깊은 복수구두 키드구두 강가루 고도반 구두 구두 구두 들이 흩러간다.
나는 어지러운 안전 지대에서 나를 삼켜 갈 상어를 초조히 기다린다.
시와 소설, 193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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