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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정지용 시인 / 바람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5.

정지용 시인 / 바람

 

 

바람.

바람.

바람.

 

늬는 내 귀가 좋으냐?

늬는 내 코가 좋으냐?

늬는 내 손이 좋으냐?

 

내사 왼통 빨개졌네.

내사 아무치도 않다.

호호 칩어라 구보로!

 

 


 

 

정지용 시인 / 내맘에 맞는 이

 

 

당신은 내맘에 꼭 맞는이.

 

잘난 남보다 조그마치만

어리둥절 어리석은 척

옛사람 처럼 사람 좋게 웃어좀 보시요.

 

이리좀 돌고 저리좀 돌아 보시요.

 

코 쥐고 뺑뺑이 치다 절 한 번만 합쇼.

 

호.호.호.호. 내맘에 꼭 맞는이.

 

큰말 타신 당신이

쌍무지개 홍예문 틀어세운 벌로

내달리시면

 

나는 산날맹이 잔디밭에 앉어

기를 부르지요.

 

[앞으로----가.요.]

 

[뒤로--가.요.]

 

키는 후리후리. 어깨는 산고개 같어요.

 

호.호.호.호. 내 맘은 맞는이.

 

 


 

 

정지용 시인 / 조약돌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앓은 페에로의 설움과

첫길에 고달픈

청제비의 푸념겨운 지줄댐과,

 

꾀집어 아즉 붉어 오르는

피에 맺혀,

비 날리는 이국 거리를

탄식하며 헤매노나,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정지용 시인 / 바다 1

 

 

오.오.오.오.오.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오.오.오.오. 연달아서 몰아 온다.

 

간밤에 잠 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썩, 처얼썩, 철썩, 처얼썩, 철썩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사이사이로 춤을 추어

 

 


 

 

정지용 시인 / 바다 2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오므라들고 …… 펴고 …….

 

({시원} 5호, 1935.12)

 

 


 

 

정지용 시인 / 바다 3

 

 

외로운 마음이

한종일 두고

 

바다를 불러---

 

바다 우로

밤이

걸어 온다.

 

 


 

 

정지용 시인 / 바다 4

 

 

후주근한 물결소리 등에 지고 홀로 돌아가노니

어데선지 그누구 쓰러져 울음 우는듯한 기척,

 

돌아서서 보니 먼 등대가 반짝 반짝 깜박이고

갈매기떼 끼루룩 비를 부르며 날어간다.

 

울음 우는 이는 등대도 아니고 갈매기도 아니고

어덴지 홀로 떨어진 이름 모를 서러움이 하나.

 

 


 

 

정지용 시인 / 바다 7

 

 

바다는

푸르오,

 

모래는

희오, 희오,

 

수평선 우에

살포-시 내려앉는

정오 하늘,

 

한 한가운데 돌아가는 태양,

 

내 영혼도

이제

고요히 고요히 눈물겨운 백금 팽이를 돌리오.

 

 


 

정지용[鄭芝溶, 1902.5.15 ~ 1950.9.25] 시인

1902년 충북 옥천 에서 출생. 휘문고보 재학 시절《서광》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음.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 해방이 되서는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지 못하나 북한이 최근 발간한 조선대백과사전에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기록되어 있음. 주요 저서로는 『정지용 시집』, 『백록담』, 『지용문학독본』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