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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백석 시인 / 꼴두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4.

백석 시인 / 꼴두기

― 물닭의 소리 6

 

 

신새벽 들망에

내가 좋아하는 꼴두기가 들었다

갓 쓰고 사는 마음이 어진데

새끼 그믈에 걸리는 건 어인 일인가

 

갈매기 날어온다

 

입으로 먹을 뿜는 건

멫십년 도를 닦어 퓌는 조환가

앞뒤로 가기를 마음대로 하는 건

손자(孫子)의 병서(兵書)도 읽은 것이다

갈매가 쭝얼댄다

 

그러나 시방 꼴두기는 배창에 너불어저 새새기 같은

울음을 우는 곁에서

배ㅅ사람들의 언젠가 아훕이서 회를 처먹고도 남어 한 깃씩 논아가지고갔다는 크디큰 꼴두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슬프다

 

갈매기 날어난다

 

 

신새벽 : 이른새벽

들망 : 후릿그물. 바다나 큰 강물에 넓게 둘러치고 여러 사람이 그 두 끝을 끌어당기어 물고기를 잡는 큰 그물

꼴두기 : 두족류(頭足類)의 연체동물. 생김새는 낙지와 비슷하고 몸길이는 다리끝까지 24cm 가량. 몸통에 도톨도톨한 혹이 솟아있고 여덟 개의 발이 있음. 몸빛깔은 회색을 띤 적갈색이며, 만(灣)의 얕은 바다에 삶

한깃 : 한 조각. 어떤 것을 여러 조각으로 나눌 때의 그 한몫

 

 


 

 

백석 시인 / 박각시 오는 저녁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 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다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당콩밥 : 강남콩이 많이 들어간 밥. 바기지꽃 : 박꽃

박각시 : 박각시 나방. 박쥐나방. 박쥐나비과에 딸린 나비의 한가지 해질 무렵에 나와서 주로 박꽃 등을 찾아 다니며 긴 주둥아리

호스로 꿀을 빨아 먹으며 공중에 난다. 날면서 먹이를 먹는 까닭에 언제나 소리가 붕붕하게 크게 난다. 몸의 길이 46mm, 벌린 날개의 길이 97mm, 앞날개에는 잿빛의 무뉘가 있고 가운데는 어두운 빛임. 유충은 고구마나 나팔꽃의 잎을 먹음

주락시 : 주락시 나방.

한불 : 상당히 많은 것들이 한 표면을 덮고 있는 상태.

돌우래 : 말똥 벌레나 땅강아지와 비슷하나 크기는 조금 더 크다. 땅을 파고 다니며 '오르오르' 소리를 낸다. 곡식을 못 살 게 굴며 특히 감자밭이나 콩밭에 들어가서 감자줄기를 끊어 놓으며 땅을 판다.

팟중이 :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크기는 3.2cm ~ 4.5cm 정도로 갈색, 콩중이와 비슷한데 조금 작은편

 

 


 

 

백석 시인 / 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구붓하고: 몸이 구부정한

모래톱: 넓은 모래 벌판, 모래사장

지중지중: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 의태어

개지꽃: 나팔꽃

쇠리쇠리하야: 눈이 부셔, 눈이 시려

 

 


 

 

백석 시인 /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따디기: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 무렵

누굿하니: 여유있는

살틀하든: 너무나 다정스러우며 허물없이 위해주고 보살펴 주던

 

 


 

 

백석 시인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엽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잠풍: 잔잔하게 부는 바람

달재: 달째, 달강어, 쑥지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진장: 진간장, 오래 묵어서 진하게 된 간장

 

 


 

백석(白石) 시인 (1912.7.1~1995)

본명 백기행(夔行).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