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오후(午後)의 꿈은 날 줄을 모른다
날아갈 줄을 모르는 나의 날개.
나의 꿈은 오후의 피곤한 그늘에서 고양이처럼 졸리웁다.
도무지 아름답지 못한 오후는 꾸겨서 휴지통에나 집어 넣을까?
그래도 지문학(地文學)의 선생님은 오늘도 지구는 원만하다고 가르쳤다나. 갈릴레오의 거짓말쟁이.
흥 창조자를 교수대에 보내라.
하느님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성한 날개를 다고. 나는 화성(火星)에 걸터앉아서 나의 살림의 깨어진 지상(地上)을 껄 껄 껄 웃어주고 싶다.
하느님은 원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을까?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올빼미의 주문(呪文)
태풍은 네거리와 공원과 시장에서 먼지와 휴지와 캐비지와 연지와 연애의 유행을 쫓아 버렸다
헝클어진 거리를 이 구석 저 구석 혓바닥으로 뒤지며 다니는 밤바람 어둠에게 벌거벗은 등을 씻기우면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전선주(電線柱) 엎드린 모래벌의 허리에서는 물결이 가끔 흰 머리채를 추어든다 요란스럽게 마시고 지껄이고 떠들고 돌아간 뒤에 테블 위에는 깨어진 잔들과 함부러 지꾸어진 방명록과…… 아마도 서명만 하기 위하여 온 것처럼 총총히 펜을 던지고 객들은 돌아갔다 이윽고 기억들도 그 이름들을 마치 때와 같이 총총히 빨아 버릴 게다
나는 갑자기 신발을 찾아 신고 도망할 자세를 갖춘다 길이 없다 돌아서 등불을 비틀어 죽인다 그는 비둘기처럼 거짓말쟁이였다 황홀한 불빛의 영화(榮華)의 그늘에는 몸을 졸여 없애는 기름의 십자가가 있음을 등불도 비둘기도 말한 일이 없다
나는 신자(信者)의 숭내를 내서 무릎을 꿇어 본다 믿을 수 있는 신이나 모신 것처럼 다음에는 깃발처럼 호화롭게 웃어버린다 대체 이 피곤을 피할 하룻밤 주막은 아라비아의 알라스카의 어느 가시밭에도 없느냐 연애와 같이 싱겁게 나를 떠난 희망은 지금 또 어디서 복수를 준비하고 있느냐 나의 머리에 별의 꽃다발을 두었다가 거두어 간 것은 누구의 변덕이냐 밤이 간 뒤엔 새벽이 온다는 우주의 법칙은 누구의 실없는 장난이냐 동방의 전설처럼 믿을 수 없는 아마도 실패한 실험이냐 너는 애급에서 돌아온 씨―자냐
너의 주둥아리는 진정 독수리냐 너는 날개 돋힌 흰 구름의 종족이냐 너는 도야지처럼 기름지냐 너의 숨소리는 바다와 같이 너그러우냐 너는 과연 천사의 가족이냐
귀먹은 어둠의 철문 저편에서 바람이 터덜터덜 웃나보다 어느 헝클어진 수풀에서 부엉이가 목쉰 소리로 껄껄 웃나보다
내일이 없는 칼렌다를 쳐다보는 너의 눈동자는 어쩐지 별보다 이쁘지 못하고나 도시 19세기처럼 흥분할 수 없는 너 어둠이 잠긴 지평선 너머는 다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음악은 바다 밑에 파묻힌 오래인 옛말처럼 춤추지 않고 수풀 속에서는 전설이 도무지 슬프지 않다 페이지를 번지건만 너멋장에는 결론이 없다 모퉁이에 혼자 남은 가로등은 마음은 슬퍼서 느껴서 우나 부릅뜬 눈에 눈물이 없다
거칠은 발자취들이 구르고 지날갈 때에 담벼락에 달라붙는 나의 숨소리는 생쥐보다도 커 본 일이 없다 강아지처럼 거리를 기웃거리다가도 강아지처럼 얻어맞고 발길에 채어 돌아왔다
나는 참말이지 선량하려는 악마다 될 수만 있으면 신이고 싶은 짐승이다 그렇건만 밤아 너의 썩은 밧줄은 왜 이다지도 내 몸에 깊이 친절하냐 무너진 축대의 근방에서는 바다가 또 아름다운 알음소리를 치나 보다
그믐밤 물결의 노래에 취할 수 있는 타골의 귀는 응당 소라처럼 행복스러울 게다
어머니 어머니의 무덤에 마이크를 가져갈까요 사랑스러운 해골 옛날의 자장가를 기억해 내서 병신 된 나의 귀에 불러 주려우
자장가도 부를 줄 모르는 바보인 바다
바다는 다만 어둠에 반란하는 영원한 불평가(不平家)다
바다는 자꾸만 헌 이빨로 밤을 깨문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요양원
저마다 가슴 속에 암종(癌腫)을 기르면서 지리한 역사의 임종을 고대한다.
그날 그날의 동물의 습성에도 아주 익어 버렸다. 표본실의 착한 윤리에도 아담하게 고정한다.
인생아 나는 용맹한 포수인 체 숨차도록 너를 좇아 다녔다.
너는 오늘 간사한 메추라기처럼 내 발 앞에서 포도독 날아가 버리는구나.
바다와 나비, 신문화연구소,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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