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탸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 오막살이 고조곤히: 고요히, 소리없이
백석 시인 / 통영2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 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당: 고장 갓갓기도: 가깝기도 아개미: 아가미 호루기: 쭈꾸미와 비슷하게 생긴 해산물 황화장사: 온갖 잡살뱅이 물건을 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 오구작작: 여러 사람이 뒤섞여 떠드는 수선스런 모양
백석 시인 / 늙은 갈대의 독백
해가 진다 갈새는 얼마 아니하야 잠이 든다 묽닭도 쉬이 어늬 낯설은 논드렁에서 돌아온다 바람이 마을을 오면 그때 우리는 설게 늙음의 이야기를 편다
보름밤이면 갈거이와 함께 이 언덕에서 달보기를 한다 강물과 같이 세월의 노래를 부른다 새우들이 마름 잎새에 올라앉는 이때가 나는 좋다
어늬 처녀가 내 닢을 따 갈부던을 결었노 어늬 동자가 내 잎닢 따 갈나발을 불었노 어늬 기러기 내 순한 대를 입에다 물고갔노 아-- 어늬 태공망이 내 젊음을 낚어갔노
이몸의 매딥매딥 잃어진 사랑의 허물자국 별많은 어늬 밤 강을 날여간 강다리ㅅ배의 갈대피리 비오는 어늬 아침 나루ㅅ배 나린 길손의 갈대 지팽이 모다 내 사랑이었다
해오라비 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 --벼름질로 돌아오는 낫이 나를 다리려 왔다 달구지 타고 산골로 삿자리의 벼슬을 갔다.
백석 시인 / 황일
한 십리 더 가면 절간이 있을 듯한 마을이다 낮 기울은 볕이 장글장글 하니 따사하다 흙은 젖이 커서 살같이 깨서 아지랑이 낀 속이 안타까운가보다 뒤울안에 복사꽃 핀 집엔 아무도 없나보다 뷔인 집에 꿩이 날어와 다니나보다 울밖 늙은 들매나무에 튀튀새 한불 앉었다 흰구름 따러가며 딱장벌레 잡다가 연두빛 닢새가 좋아 올라왔나보다 밭머리에도 복사꽃 피였다 밭머리에도 복사꽃 피였다 새악시도 피였다 새악시 복사꽃이다 복사꽃 새악시다 어데서 송아지 매--하고 운다 골갯논드렁에서 미나리 밟고 서서 운다 복사나무 아래 가 흙장난하며 놀지 왜 우노 자개밭둑에 엄지 어데 안 가고 누웠다 아릇동리선가 말 웃는 소리 무서운가 아릇동리 망아지 네 소리 무서울라 담모도리 바윗잔등에 다람쥐 해바라기하다 조은다 토끼잠 한잠 자고 나서 세수한다 흰구름 건넌산으로 가는 길에 복사꽃 바라노라 섰다 다람쥐 건넌산 보고 부르는 푸념이 간지럽다
저기는 그늘 그늘 여기는 챙챙-- 저기는 그늘 그늘 여기는 챙챙---
백석 시인 / 삼천포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늬 눈 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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