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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정지용 시인 / 슬픈 기차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6.

정지용 시인 / 슬픈 기차

 

 

우리들의 기차는 아지랑이 남실거리는 섬나라 봄날 온 하루를

익살스런 마도로스 파이프를 피우며 간 단 다.

우리들의 기차는 느으릿 느으릿 유월 소 걸어가듯 걸어 간 단 다.

우리들의 기차는 노오란 배추꽃 비탈밭 새로

헐레벌떡거리며 지나 간 단 다.

 

나는 언제든지 슬프기는 슬프나마 마음만은 가벼워

나는 차창에 기댄 대로 휘파람이나 날리자.

 

먼 데 산이 군마처럼 뛰어오고 가까운 데 수풀이 바람처럼 불려 가고

유리판을 펼친 듯, 뇌호내해 퍼언한 물 물. 물. 물.

손가락을 담그면 포도빛이 들으렷다.

 

입술에 적시면 탄산수처럼 끓으렷다.

복스런 돛폭에 바람을 안고 뭇 배가 팽이처럼 밀려가다 간,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나는 차창에 기댄 대로 옥토끼처럼 고마운 잠이나 들자.

청만틀 깃자락에 마담 R의 고달픈 뺨이 불그레 피었다, 고운 석탄불처럼

이글거린다. 당치도 않은 어린아이 잠재기 노래를 부르심은 무슨 뜻이뇨?

 

잠들어라.

가여운 내 아들아.

잠들어라.

 

나는 아들이 아닌 것을, 웃수염 자리 잡혀가는, 어린 아들이 버얼써 아닌 것을.

나는 유리쪽에 갑갑한 입김을 비추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름이나 그시며 가 자.

나는 느긋느긋한 가슴을 밀감쪽으로나 씻어 내리자.

 

대수풀 울타리마다 요염한 관능과 같은 홍춘이 피맺혀 있다.

마당마다 솜병아리 털이 폭신폭신하고,

지붕마다 연기도 아니 뵈는 햇볕이 타고 있다.

오오, 개인 날씨야, 사랑과 같은 어질머리야, 어질머리야.

 

청만틀 깃자락에 마담 R의 가여운 입술이 여태껏 떨고 있다.

누나다운 입술을 오늘이야 실컷 절하며 갚노라.

나는 언제든지 슬프기는 슬프나마,

오오, 나는 차보다 더 날아가려지는 아니하련다.

 

 


 

 

정지용 시인 / 황마차(幌馬車)

 

 

이제 마악 돌아나가는 곳은 時計집 모퉁이, 낮에는 처마끝에 달어맨 종달새란 놈이 도회(都會)바람에 나이를 먹어 조금 연기 끼인 듯한 소리로 사람 흘러나려가는 쪽으로 그저 지줄거립데다.

 

그 고달픈 듯이 깜박깜박 졸고 있는 모양이-가여운 잠의 한점이랄지요- 부칠 데 없는 내맘이 떠올릅니다. 쓰다듬어 주고 싶은, 쓰다듬을 받고 싶은 내 마음이올시다. 가엾은 내 그림자는 검은 상복(喪服)처럼 지향없이 흘러나려갑니다. 촉촉히 젖은 리본 떨어진 낭만풍(浪漫風)의 모자(帽子) 밑에는 金붕어의 분류(奔流)와도 같은 밤경치가 흘러나려갑니다. 길옆에 늘어슨 어린 은행(銀杏)나무들은 이국 척후병(異國斥候兵)의 걸음세로 조용조용히 흘러나려갑니다.

 

슬픈 은 안경(銀眼鏡)이 흐릿하게

밤비는 옆으로 무지개를 그린다.

 

이따금 지나가는 늦인 전차(電車)가 끼이익 돌아나가는 소리에 내 조고만 혼(魂)이 놀란 듯이 파다거리나이다. 가고 싶어 따뜻한 화로갛을 찾어가고 싶어. 좋아하는 코-란 經을 읽으면서 남경(南京)콩이나 까먹고 싶어, 그러나 나는 찾어 돌아갈 데가 있을나구요?

 

네거리 모퉁이에 씩 씩 뽑아 올라간 붉은 벽돌집 塔에서는 거만스러운 12시가 피뢰침(避雷針)에게 위엄있는 손까락을 치여들었소. 이제야 내 목아지가 쭐 삣떨어질 듯도 하구료. 솔닢새 갚은 모양새를 하고 걸어가는 나를 높다란 데서 굽어보는 것은 아주 재미있을 게지요. 마음놓고 술술 소변이라도 볼까요. 헬멧 쓴 야경순사(夜警巡査)가 필일림처럼 쫓아오겠지요!

 

네거리 모통이 붉은 담벼락이 훔씬 젖었소. 슬픈 도회(都會)의 뺨이 젖었소. 마음은 열없이 사랑의 낙서(落書)를 하고 있소. 홀로 글성글성 눈물 짖고 있는 것은 가엾은 소-니야의 신세를 비추는 빨간 전등(電燈)의 눈알이외다. 우리들의 그 전날밤은 이다지도 슬픈지요. 이다지도 외로운지요. 그러면 여기서 두 손을 가슴에 념이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릿가?

 

길이 아조 질어터져서 뱀눈알 같은 것이 반쟉 반쟉어리고 있오. 구두가 어찌나 크던동 거러가면서 졸님이 오십니다. 진흙에 착 붙어 버릴 듯하오. 철없이 그리워 둥그스레한 당신의 어깨가 그리워. 거기에 내 머리를 대이면 언제든지 머언 따뜻한 바다 울음이 들려오더니......

 

......아아, 아모리 기다려도 못오실 니를 ......

 

기다려도 못 오실 니 때문에 졸리운 마음은 황마차(幌馬車)를 부르노니, 회파람처럼 불려오는 황마차(幌馬車)를 부르노니, 은으로 만들은 슬픔을 실은 원앙새 털 깔은 황마차(幌馬車), 꼬옥 당신처럼 참한 황마차(幌馬車), 찰 찰찰 황마차(幌馬車)를 기다리노니.

 

 


 

 

정지용 시인 /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날도

비가 오시네...

 

 


 

 

정지용 시인 / 비로봉

 

 

백화(白樺)수풀 앙당한 속에

계절이 쪼그리고 있다.

 

이곳은 육체 없는 적막한 향연장

이마에 스며드는 향료로운 자양!

 

해발 오천 피이트 권운층 우에

그싯는 성냥불!

 

동해는 푸른 삽화처럼 옴직않고

누뤼 알이 참벌처럼 옮겨 간다.

 

연정은 그림자 마자 벗쟈

산드랗게 얼어라! 귀뚜라미처럼.

 

 


 

정지용[鄭芝溶, 1902.5.15 ~ 1950.9.25] 시인

1902년 충북 옥천 에서 출생. 휘문고보 재학 시절《서광》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음.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 해방이 되서는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지 못하나 북한이 최근 발간한 조선대백과사전에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기록되어 있음. 주요 저서로는 『정지용 시집』, 『백록담』, 『지용문학독본』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