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수박씨, 호박씨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 와서 어진 사람의 짓을 어진 사람의 마음을 배워서 수박씨 닦은 것을 호박씨 닦은 것을 입으로 앞니빨로 밝는다
수박씨 호박씨 입에 넣은 마음은 참으로 철없고 어리석고 게으른 마음이나 이것은 또 참으로 밝고 그윽하고 깊고 무거운 마음이라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니, 오랜 지햬가 또 아득하니 오랜 인정(人精)이 깃들인 것이다 태산(泰山)의 구름도 황하(黃河)의 물도 옛임금의 땅과 나무의 덕도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뵈이는 것이다
이 작고 가벼웁고 갤족한 희고 까만 씨가 조용하니 또 도고하니 손에서 입으로 입에서 손으로 오르나리는 때 벌에 우는 새소리도 듣고 싶고, 거문고도 한 곡조 뜯고 싶고, 한 오천(五千)말 남기고 함곡관(函谷關)도 넘어가고 싶고 기쁨이 마음에 뜨는 때는 희고 까만 씨를 앞니로 까서 잔나비가 되고 근심이 마음에 앉는 때는 희고 까만 씨를 혀 끝에 물어 까막까치가 되고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서는 오두미(五斗米)를 버리고 버드나무 아래로 돌아온 사람도 그 넢차게에 수박씨 닦은 것은 호박씨 닦은 것은 있었을 것이다 나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었던 사람도 그 머리맡에 수박씨 닦은 것은 호박씨 닦은 것은 있었을 것이다
백석 시인 / 북관(北關) -함주시초(咸州詩抄)
명태(明太) 찬난적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여 익인 것을 이 투박한 북관(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을 끊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릐 살내음애를 맡는다
얼큲란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新羅) 백성의 향수(鄕愁)도 맛본다
백석 시인 /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오늘은 정월(正月) 보름이다 대보름이 명절인데 나는 말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예날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 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올 지날 것이였만 나는 오늘 때묻은 입든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예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한 한 적도 있었을 것이나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 고행 사람의 조그마한 가업 집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고 한 그릇 사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 날엔 으레히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부도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은 그 어느 한 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飯館)을 찾아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든 본대로 원소(元宵)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은 외로이 타관에서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아득하니 슬펐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다 아, 이 정월(正月)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독이 탕탕 터지고 호궁(胡弓) 소리 삘삘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엔 자꾸 이 나라의 옛 시인들이 그들의 쓸쓸한 마음들이 생각난다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나 이백 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려나 이것은 옛 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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