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인 / 해도(海圖)에 대하여
산(山)봉오리들의 나즉한 틈과 틈을 새여 남(藍)빛 잔으로 흘러들어오는 어둠의 조수(潮水). 사람들은 마치 지난밤 끝나지 아니한 약속(約束)의 계속인 것처럼 그 칠흑(漆黑)의 술잔을 들이켠다. 그러면 해는 할 일 없이 그의 희망(希望)을 던져 버리고 그만 산(山)모록으로 돌아선다.
고양이는 산(山)기슭에서 어둠을 입고 쪼그리고 앉아서 밀회(密會)를 기다리나 보다. 우리들이 버리고 온 행복(幸福)처럼……. 석간신문(夕刊新聞)의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지도(地圖) 우를 도마배암이처럼 기어가는 별들의 그림자의 발자국들. `미스터․뽈드윈'의 연설(演說)은 암만해도 빛나지 않는 전혀 가엾은 황혼(黃昏)이다.
집 이층집 강(江) 웃는 얼굴 교통순사(交通巡査)의 모자 그대와의 약속(約束)…… 무엇이고 차별(差別)할 줄 모르는 무지(無知)한 검은 액체(液體)의 범람(汎濫) 속에 녹여 버리려는 이 목적(目的)이 없는 실험실(實驗室) 속에서 나의 작은 탐험선(探險船)인 지구(地球)가 갑자기 그 항해(航海)를 잊어버린다면 나는 대체 어느 구석에서 나의 해도(海圖)를 편단 말이냐?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해상(海上)
SOS
오후 여섯시 삼십분.
돌연
어둠의 바다의 암초에 걸려 지구는 파선했다.
`살려라'
나는 그만 그를 건지려는 유혹을 단념한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향수(鄕愁)
나의 고향은 저 산(山) 너머 또 저 구름 밖 아라사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
나는 문득 가로수(街路樹) 스치는 저녁 바람 소리 속에서 여엄―염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선다.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
작은 등불을 달고 굴러가는 자동차의 작은 등불을 믿는 충실한 행복을 배우고 싶다.
만약에 내가 길거리에 쓰러진 깨어진 자동차라면 나는 나의 노―트에서 장래라는 페이지를 벌―써 지워버렸을텐데……
대체 자정이 넘었는데 이 미운 시를 쓰노라고 베개로 가슴을 고인 동물은 하느님의 눈동자에는 어떻게 가엾은 모양으로 비칠까? 화물자동차보다도 이쁘지 못한 사족수(四足獸).
차라리 화물자동차라면 꿈들의 파편을 거둬 싣고 저 먼―항구로 밤을 피하여 가기나 할 터인데…….
기상도, (자가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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