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김기림 시인 / 해도(海圖)에 대하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8.

김기림 시인 / 해도(海圖)에 대하여

 

 

산(山)봉오리들의 나즉한 틈과 틈을 새여 남(藍)빛 잔으로 흘러들어오는 어둠의 조수(潮水). 사람들은 마치 지난밤 끝나지 아니한 약속(約束)의 계속인 것처럼 그 칠흑(漆黑)의 술잔을 들이켠다. 그러면 해는 할 일 없이 그의 희망(希望)을 던져 버리고 그만 산(山)모록으로 돌아선다.

 

고양이는 산(山)기슭에서 어둠을 입고 쪼그리고 앉아서 밀회(密會)를 기다리나 보다. 우리들이 버리고 온 행복(幸福)처럼……. 석간신문(夕刊新聞)의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지도(地圖) 우를 도마배암이처럼 기어가는 별들의 그림자의 발자국들. `미스터․뽈드윈'의 연설(演說)은 암만해도 빛나지 않는 전혀 가엾은 황혼(黃昏)이다.

 

집 이층집 강(江) 웃는 얼굴 교통순사(交通巡査)의 모자 그대와의 약속(約束)…… 무엇이고 차별(差別)할 줄 모르는 무지(無知)한 검은 액체(液體)의 범람(汎濫) 속에 녹여 버리려는 이 목적(目的)이 없는 실험실(實驗室) 속에서 나의 작은 탐험선(探險船)인 지구(地球)가 갑자기 그 항해(航海)를 잊어버린다면 나는 대체 어느 구석에서 나의 해도(海圖)를 편단 말이냐?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해상(海上)

 

 

  SOS

 

  오후 여섯시 삼십분.

 

돌연

 

  어둠의 바다의 암초에 걸려

  지구는 파선했다.

 

  `살려라'

 

  나는 그만 그를 건지려는 유혹을 단념한다.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 시인 / 향수(鄕愁)

 

 

나의 고향은

저 산(山) 너머 또 저 구름 밖

아라사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

 

나는 문득

가로수(街路樹) 스치는 저녁 바람 소리 속에서

여엄―염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선다.

 

태양의 풍속, 학예사, 1939

 

 


 

 

김기림 시인 /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

 

 

작은 등불을 달고 굴러가는 자동차의 작은 등불을 믿는 충실한 행복을 배우고 싶다.

 

만약에 내가 길거리에 쓰러진 깨어진 자동차라면 나는 나의 노―트에서 장래라는 페이지를 벌―써 지워버렸을텐데……

 

대체 자정이 넘었는데 이 미운 시를 쓰노라고 베개로 가슴을 고인 동물은 하느님의 눈동자에는 어떻게 가엾은 모양으로 비칠까? 화물자동차보다도 이쁘지 못한 사족수(四足獸).

 

차라리 화물자동차라면 꿈들의 파편을 거둬 싣고 저 먼―항구로 밤을 피하여 가기나 할 터인데…….

 

기상도, (자가본), 1936

 

 


 

김기림[金起林, 1908. 5.11 ~?]시인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출생.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대학을 거쳐, 도호쿠제국대학 영어영문과 졸업. 193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꿈꾸는 眞珠여 바다로 가자〉(조선일보, 1931. 1. 23) · 〈전율(戰慄)하는 세기(世紀)〉(學燈 창간호, 1931. 10.) ∙ 〈고대(苦待)〉(新東亞 창간호, 1931. 11.)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단하고, 주지주의에 관한 단상(斷想)인〈피에로의 독백〉(조선일보, 1931. 1. 27.)을 발표하여 평론계에 등단,

 그 뒤 시창작과 비평의 두 분야에서 활동.  문학 활동은 九人會(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적으로 남아 있음. 모더니즘 이론에 입각하여 창자고가 비평에서 두루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다소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도 했음.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됨. 대표 저서로는 시집으로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고,  비평 및 이론서로『문학개론』, 『시론』, 『시의 이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