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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림 시인 / 청도장 ㅡ이서국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입구
1
청도 사람에게 이서국은 세상을 보는 거울이다. 이 세상이 이서국의 안이고 밖이다.
2
이천 년 청도 사람 밥줄 이어온 장터 어귀 오동나무 밑 생선 파는 늙은 과부 장씨, 대대로 장터 살아온 어머니 닮아 새까맣고 기름기 빠진 얼굴에 자잘한 욕정과 좌절이 검버섯으로 박혀, 인생살이 모든 게 그저 목쉬는 흥정으로 그에게 세상은 절인 고등어다. 아비도 모르는 아이 지우고 기어 들어와 실밥처럼 풀어진 딸년 생각에 파장 때 남은 고등어로 잉어 한 마리 사 타박타박 낮은 고개 넘어오는 장씨는 더 작아 보였다. 서쪽 하늘은 감빛이고
감빛 노을 받으며 장씨 조상 이서국 늙은 수렵꾼, 값비싼 꽃사슴 가죽으로 어쩔 수 없이 바꾼 잉어 들고 솔개에 채인 수탉 되어 힘없이 낮은 고개 넘는다. 집에는, 작년 봄 빚값으로 중랑장에게 끌려갔다가 병들어 쫓겨온 임신한 딸, 기다리다 울며 감빛에 젖은 도라지 꺾는다. 도라지는 퍼런 눈물 흘리고. 수렵꾼에게 삶이란 힘들게 구입했다가 손쉽게 잃어버리는 화살촉이거나 자신도 아끼는 닳아빠진 곰가죽옷이다. 하지만 또 가마솥에 푹 고아낸, 쓸개를 터뜨리지 않고 짜내야 할 잉어이기도 하다.
3
잉어 고고 있는 솥 말없이 바라보며 장씨 딸, 납빛 얼굴 노을에 담그고 도라지 꺾는 손에 이서국 수렵꾼 딸 흘린 눈물 젖는다. 청도장서 어머니 따라 생선장사나 할 그녀, 지금 뼈까지 녹아 내린 이서국 잉어 즙 짜내고
* 중랑장(中郞將) : 삼한 시대 통치계급의 하나. * 이서국 : 경북 청도 지방에 있던 고대 小國의 하나.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문학동네, 1995) 중에서
최서림 시인 / 푸른빛으로 돌아오다 ㅡ노예 4
마른장마에도, 온통, 푸른빛이었다
黙溪里 가는 길은 푸른빛으로 돌아오는 길, 푸른빛은 늑골 사이로 나온다 심장에 새치가 희끗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새치 사이로 옛 강이 슬며시 다시 흐르고 물새가 흩어진다 깊은 물 우에서 햇빛이 꺾여 푸른빛을 낸다 굽은 빛이 속살 깊숙이 파고든다 안개를 먹은, 혼돈의 급류에 끌려 다녀 무릎 꿇은 중년의 빛은 아름답게 휘인다
여행은 굽은 마음이 잠시 허리 펴는 것, 길은 늑골 밑에서 기어 나와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이 삼십 넘으면 인생에서 송장냄새가 난다던 후배, 그의 旅路는 아직 햇빛 뒤꽁무니에 매달려 발버둥치리라 내게도 빛이 직선으로만 운동하던 때가 있었다 강바닥까지 비추며 물살을 몰아가던
사춘기, 어린 늑골 사이로 늘 강물이 깊었고 물새가 하얗게 울었다 햇빛을 잡아먹고 강은 푸르게 내장을 뒤척였다 얼굴 없는 푸른 빛 속에서 자맥질하다 잠들고……어느 날 햇빛 아가리 속으로 뱉아져……
묵계리까지 여행은, 낯․익․어․아․름․다․운 안개 속에 먼저 가 숨어 있는 나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문학동네, 199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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