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 / 무신(無信)
그대가 돌이켜 물을 줄도 내가 아노라, `무엇이 무신(無信)함이 있더냐?' 하고, 그러나 무엇하랴 오늘날은 야속히도 당장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을, 물과 같이 흘러가서 없어진 맘이라고 하면.
검은 구름은 멧기슭에서 어정거리며, 애처롭게도 우는 산의 사슴이 내 품에 속속들이 붙안기는 듯. 그러나 밀물도 쎄이고 밤은 어두워 닻주었던 자리는 알 길이 없어라. 시정(市井)의 흥정 일은 외상으로 주고받기도 하건마는.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물마름
주으린 새무리는 마른 나무의 해 지는 가지에서 재갈이던 때. 온종일 흐르던 물 그도 곤하여 놀 지는 골짜기에 목이 메던 때.
그 누가 알았으랴 한쪽 구름도 걸려서 흐득이는 외로운 영(嶺)을 숨차게 올라서는 여윈 길손이 달고 쓴 맛이라면 다 겪은 줄을.
그곳이 어디더냐 남이 장군이 말 먹여 물 끼얹던 푸른 강물이 지금에 다시 흘러 둑을 넘치는 천백리 두만강이 예서 백십리.
무산(茂山)의 큰 고개가 예가 아니냐 누구나 예로부터 의를 위하여 싸우다 못 이기면 몸을 숨겨서 한때의 못난이가 되는 법이라.
그 누가 생각하랴 삼백 년래에 차마 받지 다 못할 한과 모욕을 못 이겨 칼을 잡고 일어섰다가 인력의 다함에서 스러진 줄을.
부러진 대쪽으로 활을 메우고 녹슬은 호미쇠로 칼을 별러서 도독(茶毒) 된 삼천리에 북을 울리며 정의의 기를 들던 그 사람이여.
그 누가 기억하랴 다북동에서 피 물든 옷을 입고 외치던 일을 정주성 하룻밤의 지는 달빛에 애끊긴 그 가슴이 숫기 된 줄을.
물 위에 뜬 마름에 아침 이슬을 불붙는 산마루에 피었던 꽃을 지금에 우러르며 나는 우노라 이루며 못 이룸에 박(薄)한 이름을.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바닷가의 밤
한줌만 가느다란 좋은 허리는 품 안에 차츰차츰 졸아들 때는 지새는 겨울 새벽 춥게 든 잠이 어렴풋 깨일 때다 둘도 다 같이 사랑의 말로 못할 깊은 불안에 또 한끝 호주군한 옅은 몽상에. 바람은 쌔우친다 때에 바닷가 무서운 물소리는 잦 일어온다. 켱킨 여덟 팔다리 걷어채우며 산뜩히 서려 오는 머리칼이여.
사랑은 달큼하지 쓰고도 맵지. 햇가는 쓸쓸하고 밤은 어둡지. 한밤의 만난 우리 다 마찬가지 너는 꿈의 어머니 나는 아버지. 일시 일시 만났다 나뉘어 가는 곳 없는 몸 되기도 서로 같거든. 아아아 허수롭다 바로 사랑도 더욱여 허수롭다 살음은 말로. 아 이봐 그만 일자 창이 희었다. 슬픈 날은 도적같이 달려들었다.
조선문단, 1926. 6
김소월 시인 / 바리운 몸
꿈에 울고 일어나 들에 나와라.
들에는 소슬비 머구리는 울어라. 풀 그늘 어두운데
뒷짐지고 땅 보며 머뭇거릴 때.
누가 반딧불 꾀어드는 수풀 속에서 `간다 잘 살아라' 하며, 노래 불러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밭고랑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았어라. 일을 필하고 쉬이는 동안의 기쁨이여.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내려쪼이며 새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 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였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었어,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 새로운 환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
다시 한 번 활기있게 웃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 들고 들어갔어라, 가지런히 가지런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여, 오오 생명의 향상이여.
진달래꽃, 매문사,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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