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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소월 시인 / 무신(無信)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7.

김소월 시인 / 무신(無信)

 

 

그대가 돌이켜 물을 줄도 내가 아노라,

`무엇이 무신(無信)함이 있더냐?' 하고,

그러나 무엇하랴 오늘날은

야속히도 당장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을, 물과 같이

흘러가서 없어진 맘이라고 하면.

 

검은 구름은 멧기슭에서 어정거리며,

애처롭게도 우는 산의 사슴이

내 품에 속속들이 붙안기는 듯.

그러나 밀물도 쎄이고 밤은 어두워

닻주었던 자리는 알 길이 없어라.

시정(市井)의 흥정 일은

외상으로 주고받기도 하건마는.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물마름

 

 

주으린 새무리는 마른 나무의

해 지는 가지에서 재갈이던 때.

온종일 흐르던 물 그도 곤하여

놀 지는 골짜기에 목이 메던 때.

 

그 누가 알았으랴 한쪽 구름도

걸려서 흐득이는 외로운 영(嶺)을

숨차게 올라서는 여윈 길손이

달고 쓴 맛이라면 다 겪은 줄을.

 

그곳이 어디더냐 남이 장군이

말 먹여 물 끼얹던 푸른 강물이

지금에 다시 흘러 둑을 넘치는

천백리 두만강이 예서 백십리.

 

무산(茂山)의 큰 고개가 예가 아니냐

누구나 예로부터 의를 위하여

싸우다 못 이기면 몸을 숨겨서

한때의 못난이가 되는 법이라.

 

그 누가 생각하랴 삼백 년래에

차마 받지 다 못할 한과 모욕을

못 이겨 칼을 잡고 일어섰다가

인력의 다함에서 스러진 줄을.

 

부러진 대쪽으로 활을 메우고

녹슬은 호미쇠로 칼을 별러서

도독(茶毒) 된 삼천리에 북을 울리며

정의의 기를 들던 그 사람이여.

 

그 누가 기억하랴 다북동에서

피 물든 옷을 입고 외치던 일을

정주성 하룻밤의 지는 달빛에

애끊긴 그 가슴이 숫기 된 줄을.

 

물 위에 뜬 마름에 아침 이슬을

불붙는 산마루에 피었던 꽃을

지금에 우러르며 나는 우노라

이루며 못 이룸에 박(薄)한 이름을.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바닷가의 밤

 

 

한줌만 가느다란 좋은 허리는

품 안에 차츰차츰 졸아들 때는

지새는 겨울 새벽 춥게 든 잠이

어렴풋 깨일 때다 둘도 다 같이

사랑의 말로 못할 깊은 불안에

또 한끝 호주군한 옅은 몽상에.

바람은 쌔우친다 때에 바닷가

무서운 물소리는 잦 일어온다.

켱킨 여덟 팔다리 걷어채우며

산뜩히 서려 오는 머리칼이여.

 

사랑은 달큼하지 쓰고도 맵지.

햇가는 쓸쓸하고 밤은 어둡지.

한밤의 만난 우리 다 마찬가지

너는 꿈의 어머니 나는 아버지.

일시 일시 만났다 나뉘어 가는

곳 없는 몸 되기도 서로 같거든.

아아아 허수롭다 바로 사랑도

더욱여 허수롭다 살음은 말로.

아 이봐 그만 일자 창이 희었다.

슬픈 날은 도적같이 달려들었다.

 

조선문단, 1926. 6

 

 


 

 

김소월 시인 / 바리운 몸

 

 

꿈에 울고 일어나

들에

나와라.

 

들에는 소슬비

머구리는 울어라.

풀 그늘 어두운데

 

뒷짐지고 땅 보며 머뭇거릴 때.

 

누가 반딧불 꾀어드는 수풀 속에서

`간다 잘 살아라' 하며, 노래 불러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밭고랑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았어라.

일을 필하고 쉬이는 동안의 기쁨이여.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내려쪼이며

새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 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였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었어,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 새로운 환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

 

다시 한 번 활기있게 웃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 들고 들어갔어라, 가지런히 가지런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여, 오오 생명의 향상이여.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시인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정식이다. 오산 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 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상대를 중퇴했다. 당시 오산 학교 교사였던 안서 김억의 지도와 영향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의 봄」, 「그리워」 등을 발표하여 시인이 되었다.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누나야」, 「닭은 꼬꾸요」 등을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 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7·5조의 정형률을 바탕으로 한시를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저서로는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