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시인 / FINALE
경이(驚異)는 아름다웠다. 모두가 다스한 숨결. 비둘기 되어 날아가누나. 하늘과 바다. 자랑스런 슬픔도 고운 슬픔도. 다―삭은 이정표. 이제는 무수한 비둘기 되어.
그대 섰는 발밑에. 넓고 설운 강물은 흘러가느니……사화산이여! 아 이 땅에 다다른 왼 처음의 산맥. 내 슬픔이 임종하노라. 내 보람 임종하노라. 내 먼저 눈을 다가린다. 나의 피앙세.
영영 숨을 모으는 그의 머리맡에서 내 먼저 눈을 가린다. 즐거이 부르던 네 노래 부를 수 없고. 고운 얼굴 가리울 희디 흰 장미 한 가지 손 앞에 없어……
자욱한 안개. 지줄지줄 지줄거리는 하늘 밑에서. 학처럼 떠난다. 외롬에 하잔히 적시운 희고 쓸쓸한 날개를 펴, 말없이 카오스에서 떠나가는 학.
두 줄기 흐르는 눈물 어찌다 스며드느냐. 한철 뗏목은 넓고 설운 강물에 흘러나리어 위태로운 기슭마다. 차고 깨끗한 이마에 한 줄기 고운 피 흘리며. 떠나는 님을 보내며. 두 줄기. 스미는 눈물. 어찌라 어찌라 나 홀로 고향에 머물러 옷깃을 적시나니까.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The Last Train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路線)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가거라 벗이여
가거라 벗이여! 너의 고향에……
우리는 눈물로 손잡는 게 아니라 그대 내어친 발길 이 길을 똑바른 싸움의 길로 디디라.
아 우리의 수많은 재물 반가운 마음에 적시는 눈시울 어찌나 굳게 잡은 우리의 손 모든 것은 설움이 이끌은 것을……
가거라 벗이여! 너의 고향에! 지난날은 모두 다 조약돌모양 차버리고 거기도 설움만이 맞이할 너의 고향에
벗이여! 그러나 손잡은 우리의 보람 손잡은 이 마음이 기쁨으로 떨릴 때까지 우리는 제각기 차내 버리자 ―지난날이 달래 주던 눈물의 달디 단 맛을……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 / 경(鯨)
점잖은 고래는 섬 모양 해상에 떠서 한나절 분수를 뿜는다. 허식(虛飾)한 신사, 풍류(風流)로운 시인이여! 고래는 분수를 중단할 때마다 어족들을 입 안에 요리하였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고전(古典)
전당포에 고물상이 지저분하게 늘어선 골목에는 가로등도 켜지는 않았다. 조금 높다란 포도도 깔리우지는 않았다. 조금 말쑥한 집과 조금 허름한 집은 모조리 충충하여서 바짝바짝 친밀하게는 늘어서 있다. 구멍 뚫린 속내의를 팔러 온 사람, 구멍 뚫린 속내의를 사러 온 사람. 충충한 길목으로는 검은 망또를 두른 주정꾼이 비틀거리고, 인력거 위에선 차(車)와 함께 이미 하반신이 썩어가는 기녀들이 비단 내음새를 풍기어 가며 가느른 어깨를 흔들거렸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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