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 / 고적(孤寂)
바다에는 얼음이 덮히고 대지(大地)는 눈속에 잠들어, 가이없는 나의 이 `고적(孤寂)'은 의지(依支)할 곳도 없어지고 말아라.
보라, 서(西)녘 하늘에는 눈썹같은 새빨간 반(半)달이 스러져들며, 새까만 밤이 헤매며 내리지 않는가.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곽산(郭山) 고을
내려쌔는 흰 눈에 밤은 고요코, 정거장(停車場) 곁 옛고을 낡은 거리엔
등(燈)불은 눈을 감고 잠들었나니, 나도 그만 누워서 잠이나 자랴.
가이없는 그날의 나의 사랑은 잠잠한 옛거리에,
소리없이 내려선 녹아버릴 눈 그것이나 다르랴.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 시인 / 꿈의 노래
밝은 햇볕은 말라가는 금(金)잔디 위의 바람에 불리우는 가마귀의 나래에 빛나며, 비인 산(山)에서 부르는 머슴군(君)의 머슴노래는 멎음없이 내리는 낙엽(落葉)의 바람소리에 섞이여, 추수(秋收)를 기다리는 넓은 들에도 빗겨 울어라.
지금(只今)은 가을, 가을에도 때는 정오(正午), 아아 그대여, 듣기조차 고운 낮은 목소리로, 조심(操心)스럽게 그대의 `꿈의 노래'를 부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나의 이상(理想)
그대는 먼 곳에서 반듯거리는 내 길을 밝혀주는 외로운 벗, 한 줄기의 적은 빛을 그저 따르며 미욱스럽게도 나는 걸어가노라.
그대가 있기에 쉬임도 없고 그대가 있기에 바램도 있나니, 아아 나는 그대에게 매달리어 티끌 가득한 내 세상(世上)에서 허덕이노라.
나는 아노라, 그대의 곳에는 목숨의 흐름이 무늬 고운 물결을 짓는 아름다운 봄날의 꽃밭 속에서 화평(和平)의 꿈이 웃음으로 맺어짐을.
나의 발은 피곤(疲困)에 거듭된 피곤(疲困), 나의 가슴에는 가득한 새까만 어두움! 아아 그대 곳 없다면, 나의 몸이야 어떻게 걸으며 어떻게 살으랴.
아아 애닯아라, 그대의 곳은 한(恨) 끝도 없는 머나먼 지평선(地平線) 끝! 그러나, 나는 그저 걸으려노라, 눈먼 새 외동무를 따라가듯이.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낙타(駱駝)
새빨간 새빨간 저녁 별을 함뿍히 무거운 짐에다 받으며 사막(沙漠)을 허덕허덕 걷는 나의 낙타(駱駝)여 가도가도 사막(沙漠)은 끝없는 것을 나의 낙타(駱駝) 인생(人生)의 이 사막(沙漠)을 나는 우노라 새빨간 새빨간 저녁 별을 받으며.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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