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시인 / 공청(共靑)으로 가는 길
눈발은 세차게 내리다가도 금시에 어지러이 흐트러지고 내 겸연쩍은 마음이 공청(共靑)으로 가는 길
동무들은 벌써부터 기다릴 텐데 어두운 방에는 불이 켜지고 굳은 열의에 불타는 동무들은 나 같은 친구조차 믿음으로 기다릴 텐데
아 무엇이 자꾸만 겸연쩍은가 지난날의 부질없음 이 지금의 약한 마음 그래도 동무들은 너그러이 기다리는데……
눈발은 펑펑 내리다가도 금시에 어지러이 흐트러지고 그의 성품 너무나 맑고 차워 내 마음 내 입성에 젖지 않아라.
쏟아지렴…… 한결같이 쏟아나 지렴…… 함박 같은 눈송이.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 / 구름과 눈물의 노래
성(城)돌에 앉아 우리 다만 구름과 눈물의 노래를 불러 보려나.
산으로 산으로 따라 오르며 초막들 죄그만 죄그만 속에 그 속에 네 집이 있고 네 집에서 문을 나서면 바로 성 앞이었다.
어디메인가 이제쯤은 너 홀로 단소 부는 곳……
어둠 속 성(城)줄기를 따라 내리며 오로지 마음 속에 여며 두는 것 시꺼먼 두루마기 쓸쓸한 옷깃을 펄럭거리며 박쥐와 같이 다만 박쥐와 같이 날아 보리라.
성(城)돌에 앉아 우리 다만 구름과 눈물을 노래하려나
산마루 축대를 쌓고 띄엄띄엄 닦아 놓은 새 거리에는 병든 말이 서서 잠잔다.
눈감고 귀기울이면 무엇이 들려올까 들컹거리고 돌아가는 쇠바퀴 소리 하염없이 돌아가는 폐마의 발굽소리뿐.
성(城)돌에 앉아 우리 다만 페가사쓰와 눈물의 노래를 불러 보려나.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귀촉도(歸蜀途)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 뜸부기 울음 우는 논두렁의 어둔 밤에서 길라래비 날려 보는 외방 젊은이, 가슴에 깃든 꿈은 나래 접고 기다리는가.
흙먼지 자욱히 이는 장거리에 허리끈 끄르고, 대님 끄르고, 끝끝내 옷고름 떼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혼자 앉아서 창(窓) 넘에 뜨는 달, 상현달 바라다보면 물결은 이랑이랑 먼 바다의 향기를 품고, 파촉(巴蜀)의 인주(印朱)빛 노을은, 차차로, 더워지는 눈시울 안에―
풀섶마다 소(小)해자(孩子)의 관들이 널려 있는 뙤의 땅에는 너를 기두리는 일금칠십원야(一金七十圓也)의 쌀러리와 죄그만 STOOL이 하나 집을 떠나고, 권속마저 뿌리이치고, 장안 술 하룻밤에 마시려 해도 그거사 안 되지라요, 그러사 안 되지라요.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하늘 밑. 둘러보는 네 웃음은 용천병(病)의 꽃피는 울음 굳이 서서 웃는 검은 하늘에 상기도, 날지 않는 너의 꿈은 새벽별모양, 아 새벽별모양, 빤작일 수 있는 것일까.
춘추, 194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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