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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억 시인 / 내 설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9.

김억 시인 / 내 설움

 

 

능라도(綾羅島) 기슭의

실버드나무의 꽃이

한가로운 바람에 불리어,

수면(水面)에 잔 무늬를 놓을 때,

내 설움은 생겨났어라.

 

버들꽃의 향(香)내는 아직도 오히려,

낙엽(落葉)인 나의 설움에 섞이어,

저멀리 새파란 새파란 오월(五月)의

하늘끝을 방향(方向)도 없이 헤매고 있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내 세상(世上)은 물이런가, 구름이런가

 

 

혼자서 능라도(綾羅島)의 물가 두던에 누웠노라면

흰 물결은 소리도 없이 구비구비 흘러내리며,

저 멀리 맑은 하늘, 끝없는 저 곳에는,

흰구름이 고요도 하게 무리무리 떠돌아라.

 

물결과 같이 자취도 없이 스러지는 맘,

구름과 같이 한가도 하게 떠도는 생각.

내 세상(世上)은 물이런가, 구름이런가.

어제도 오늘도 흘러서 끝남 없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눈 -1-

 

 

무겁게도 흐리진 머리털 아래의,

회색(灰色) 구름이 차게도 하늘을 덮은 듯한,

향(香)내의 흰 분(粉)에 얼굴을 파묻고 섰는

겨울의 아낙네여, 그리하고 애인(愛人)이여.

 

떠오르며 흩어지는 연기(烟氣)의

스러져가는 한 때의 옛 사랑을

무심(無心)스럽게도 바라보고 있는

담배를 피우는 애인(愛人)이여, 아낙네여

 

옅은 웃음을 띠우며

맘의 찬 입술을 깨물고 있는 애인(愛人)이여,

날은 흐린 어득한 십일월(十一月)의

고요한 저녁의 아낙네여.

 

애인(愛人)을 버리고 가려는 애인(愛人)이여,

두꺼운 목도리를 둘러맨 아낙네여.

지금(只今)은 겨울, 올 겨울에도 눈오는 때,

말하여라,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내리나니,

 

하염없이도 땅위에 내리는 눈,

사랑과 사랑을 둘러싸는 눈,

그리하여 눈속에서 맘과 맘은 잠들었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눈 -2-

 

 

황포(黃浦) 바다에

내리는 눈은

내려도 연(連)해

녹고 맙니다.

 

내리는 족족

헛되이 지는

황포(黃浦)의 눈은

가엽습니다.

 

보람도 없는

설운 몸일래

일부러 내려

녹노랍니다.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金億) 시인 [1893.11.30~?]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시인. 주요저서 : 《오뇌의 무도》 《해파리의 노래》 《꽃다발》 《망우초》 호: 안서(岸曙). 본명: 희권(熙權). 평북 정주(定州) 출생. 오산중학(五山中學)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를 중퇴하였다. 모교인 오산중학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동아일보》와 경성방송국에서도 근무하였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평의원 등을 지내면서 친일활동을 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다가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20세 때인 1912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특히 투르게네프 ·베를렌 ·구르몽 등의 시를 번역 ·소개하여 한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는 베를렌 ·보들레르 등의 시를 번역한 것으로서 한국 시단에 상징적 ·퇴폐적 경향을 낳게 하는 촉매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타고르의 《기탄잘리》 《원정(園丁)》 《신월(新月)》 등을 번역하였고, 그 밖에 A.시몬즈 시집 《잃어버린 진주》와 한시의 번역 시집인 《꽃다발》 《망우초》 《중국 여류시선》 등이 있다. 1923년에 간행된 그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으로서 인생과 자연을 7 ·4조, 4 ·4조 등의 민요조(民謠調) 형식으로 담담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에스페란토의 선구적 연구가로서 1920년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한 상설 강습소를 만들었는데, 한성도서에서 간행한 《에스페란토 단기 강좌》(1932)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이다. 그는 특히 오산학교에서 김소월(金素月)을 가르쳐 그를 시단에 소개한 공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