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 / 내 설움
능라도(綾羅島) 기슭의 실버드나무의 꽃이 한가로운 바람에 불리어, 수면(水面)에 잔 무늬를 놓을 때, 내 설움은 생겨났어라.
버들꽃의 향(香)내는 아직도 오히려, 낙엽(落葉)인 나의 설움에 섞이어, 저멀리 새파란 새파란 오월(五月)의 하늘끝을 방향(方向)도 없이 헤매고 있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내 세상(世上)은 물이런가, 구름이런가
혼자서 능라도(綾羅島)의 물가 두던에 누웠노라면 흰 물결은 소리도 없이 구비구비 흘러내리며, 저 멀리 맑은 하늘, 끝없는 저 곳에는, 흰구름이 고요도 하게 무리무리 떠돌아라.
물결과 같이 자취도 없이 스러지는 맘, 구름과 같이 한가도 하게 떠도는 생각. 내 세상(世上)은 물이런가, 구름이런가. 어제도 오늘도 흘러서 끝남 없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눈 -1-
무겁게도 흐리진 머리털 아래의, 회색(灰色) 구름이 차게도 하늘을 덮은 듯한, 향(香)내의 흰 분(粉)에 얼굴을 파묻고 섰는 겨울의 아낙네여, 그리하고 애인(愛人)이여.
떠오르며 흩어지는 연기(烟氣)의 스러져가는 한 때의 옛 사랑을 무심(無心)스럽게도 바라보고 있는 담배를 피우는 애인(愛人)이여, 아낙네여
옅은 웃음을 띠우며 맘의 찬 입술을 깨물고 있는 애인(愛人)이여, 날은 흐린 어득한 십일월(十一月)의 고요한 저녁의 아낙네여.
애인(愛人)을 버리고 가려는 애인(愛人)이여, 두꺼운 목도리를 둘러맨 아낙네여. 지금(只今)은 겨울, 올 겨울에도 눈오는 때, 말하여라,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내리나니,
하염없이도 땅위에 내리는 눈, 사랑과 사랑을 둘러싸는 눈, 그리하여 눈속에서 맘과 맘은 잠들었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눈 -2-
황포(黃浦) 바다에 내리는 눈은 내려도 연(連)해 녹고 맙니다.
내리는 족족 헛되이 지는 황포(黃浦)의 눈은 가엽습니다.
보람도 없는 설운 몸일래 일부러 내려 녹노랍니다.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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