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 / 야(夜)의 우적(雨滴)
어데로 돌아가랴, 나의 신세는, 내 신세 가엾이도 물과 같아라.
험구진 산막지면 돌아서 가고, 모지른 바위이면 넘쳐 흐르랴.
그러나 그리해도 헤날 길 없어, 가엾은 설움만은 가슴 눌러라.
그 아마 그도 같이 야(夜)의 우적(雨滴), 그같이 지향없이 헤매임이라.
창조, 1920. 2
김소월 시인 / 어려 듣고 자라 배워 내가 안 것은
이것이 어려운 일인 줄은 알면서도, 나는 아득이노라, 지금 내 몸이 돌아서서 한 걸음만 내어놓으면! 그 뒤엔 모든 것이 꿈 되고 말련마는, 그도 보면 엎드러친 물은 흘러버리고 산에서 시작한 바람은 벌에 불더라.
타다 남은 촉(燭)불의 지는 불꽃을 오히려 뜨거운 입김으로 불어가면서 비추어 볼 일이야 있으랴, 오오 있으랴 차마 그대의 두려움에 떨리는 가슴의 속을, 때에 자리잡고 있는 낯모를 그 한 사람이 나더러 `그만하고 갑시사' 하며, 말을 하더라.
붉게 익은 댕추의 씨로 가득한 그대의 눈은 나를 가르쳐 주었어라, 열 스무 번 가르쳐 주었어라. 어려 듣고 자라 배워 내가 안 것은 무엇이랴 오오 그 무엇이랴? 모든 일은 할 대로 하여 보아도 얼마만한 데서 말 것이더라.
신천지, 1923. 8
김소월 시인 / 여수(旅愁)
1
유월 어스름 때의 빗줄기는 암황색의 시골(屍骨)을 묶어 세운 듯, 뜨며 흐르며 잠기는 손의 널 쪽은 지향도 없어라, 단청(丹靑)의 홍문(紅門)!
2
저 오늘도 그리운 바다, 건너다보자니 눈물겨워라! 조그만한 보드라운 그 옛적 심정의 분결 같던 그대의 손의 사시나무보다도 더한 아픔이 내 몸을 에워싸고 휘떨며 찔러라, 나서 자란 고향의 해 돋는 바다요.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여자의 냄새
푸른 구름의 옷 입은 달의 냄새. 붉은 구름의 옷 입은 해의 냄새. 아니 땀냄새, 때묻은 냄새. 비에 맞아 추거운 살과 옷냄새.
푸른 바다…… 어즈리는 배…… 보드라운 그리운 어떤 목숨의 조그마한 푸릇한 그무러진 영(靈) 어우러져 빗기는 살의 아우성……
다시는 장사 지나간 숲 속의 냄새. 유령 실은 널뛰는 뱃간의 냄새. 생고기의 바다의 냄새. 늦은 봄의 하늘을 떠도는 냄새.
모래 두덩 바람은 그물 안개를 불고 먼 거리의 불빛은 달 저녁을 울어라. 냄새 많은 그 몸이 좋습니다. 냄새 많은 그 몸이 좋습니다.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열락(悅樂)
어둡게 깊게 목메인 하늘. 꿈의 품 속으로서 굴러 나오는 애닯이 잠 안 오는 유령의 눈결. 그림자 검은 개버드나무에 쏟아져 내리는 비의 줄기는 흐느껴 비끼는 주문의 소리.
시커먼 머리채 풀어 헤치고 아우성하면서 가시는 따님. 헐벗은 벌레들은 꿈틀릴 때, 흑혈(黑血)의 바다. 고목 동굴. 탁목조(啄木鳥)의 쪼아리는 소리, 쪼아리는 소리.
진달래꽃, 매문사,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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