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나의 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0.

오장환 시인 / 나의 길

부제 : 3․1 기념(三․一紀念)의 날을 맞으며

 

 

기미년 만세 때

나도 소리 높이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아니 흉내라도 내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전해에 났기 때문에

어린애 본능으로 울기만 하였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나의 울음이다.

 

광주 학생 사건 때

나도 두 가슴을 헤치고 여러 사람을

따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중등학교 입학 시험에 미끄러져

그냥 시골 구석에서 한문을 배울 때였다.

타고난 불운이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그 뒤에 나는

동경에서 신문 배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붉은 동무와

나날이 싸우면서도

그 친구 말리는 붉은 시를 썼다.

 

그러나

이때도 늦은 때였다.

벌써 옳은 생각도 한철의 유행되는 옷감과 같이

철이 지났다.

그래서 내가 우니까

그때엔 모두 다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나의 울음이다.

 

8월 15일

그 울음이 내처 따라왔다.

빛나야 할 앞날을 위하여

모든 것은

나에게 지난 일을 돌이키게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울음뿐이다.

몇 사람 귀기울이는 데에 팔리어

나는 울음을 일삼아 왔다.

그리하여 나는 또 늦었다.

나의 갈 길,

우리들의 가는 길,

그것이 무엇인 줄도 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물음에 나의 대답은 또 늦었다.

 

아 나에게 조금만치의 성실이 있다면

내 등에 마소와 같이 길마를 지우라.

먼저 가는 동무들이여,

밝고 밝은 언행의 채찍으로

마소와 같은 나의 걸음을 빠르게 하라.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 / 나의 노래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아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 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나폴리의 부랑자(浮浪者)

 

 

어둠과 네온을 뚫고 적은 강물은 나폴리로 흘러내렸다.

부두에 묵묵히 앉아

청춘은 어떠한 생각에 잠길 것인가,

항구의 개울은 비린내에 섞이어 피가 흘렀다.

무거이 고개 숙이면

사원의 종소리도 들려오나

육중한 바닷물은, 끝없이 출석거리어

기―단 지팡이로 아라비아 숫자를 그려보며 마른 빵쪽을 집어던졌다.

글쎄 이방귀족이라도 좋지 않은가

어느 나라 삼등선에서 부는 보이라 소리

연화가(煙花街)의 계집이 짐을 내리고

공원 가까이 비둘기떼는 구구 운다

도미노의 쓰디쓴 웃음을 웃으나

마지막 비로―드의 검은 망또를 벗어버리나

붉은 벽돌담에 기대어 서서 떠가는 구름 바라보면 그만 아닌가

밤이면 흐르는 별이며 적은 강물에 나폴리는 함촉히 젖어

충충한 가로수 아래

꽃 파는 수레에도 등불을 끈다.

호젓한 뒷거리에 휘파람 불며

네가 배울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겠나

말없이 담배만 말고 돌층계에 기대어 앉아

포도(鋪道) 위의 야윈 조약돌을 차내 버리다.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