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 / 눈 올 때마다
하얀 눈 볼 때마다 다시금 생각나네 어린적 겨울 밤에 옛날 듣던 이야기. 송이 송이 흰 눈은 산(山)과 들에 퍼 불제 다스한 자리속에 찬 세상(世相)도 모르고―.
산(山)에는 신령(神靈)있고 물에는 용왕(龍王)님이 다같이 맡은 세상(世上) 고로이 다스리매 귀(貴)여워라, 산(山)새는 노래로 공중(空中) 날고 고기는 넓은 바다 맘대로 헴치느니.
같은 해 고은 달을 이 인생(人生) 즐길 것이 하늘에 홀로 계신 전능(全能)하신 하느님 모두다 살피시며 죄(罪)와 벌(罰) 나리시매 세상(世上)은 평화(平和)스레 이렇듯 일없느니.
집을 떠나 몇해나 이 세상(世上) 헤맸던가, 거울 보니 아니라 얼굴도 주름 졌네 까닭스런 세고(世苦)에 부대낀 탓이런가 나는 지금(只今) 비로소 이 인생(人生)을 묻노라.
산신령(山神靈)과 용왕(龍王)님 어디로 도망가니 전능(全能)한 하느님도 본색(本色)이 드러났네, 빈 하늘 내 천지(天地)라 비행기(飛行機) 높이 날 제 이 지상(地上) 볼지어다 하루나 평안(平安)한가.
시퍼런 하늘 오늘도 눈 기색(氣色)은 도는데 늙으신 어머님은 손자(孫子)를 데리시고 북방(北邦)의 같은 겨울 눈 쌓인 칩은 밤에 아직도 그 이야기 되풀이 하실런고.
안서시초, 박문서관, 1941
김억 시인 / 달과 함께
조는 듯한 등(燈)불에 덥히운 권태(倦怠)의 도시(都市)의 밤거리에 고요하게도 눈은 내리며 쌓여라.
인적(人跡)은 끊기고 눈이 멎을 때,
보라, 이러한 때에, 깊고도 넓은 끝도 없는 밤바다에 하얗게도 외로운 빛을 놓으며,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돌던지기
1
그대의 맘은 알 길 없고 고요히 돌아서서 잔돌 집어 물에 던지니 물살은 희룽희룽 둥그렇게 넓어만 지고
2
고요한 나의 맘바다에 어쩌자 그대 돌 던졌는가 물결은 미칠 듯 감돌며 끝없이 파문(波紋)을 헤치거니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 시인 / 때
때의 흐름으로 하여금 흐르는 그대를 흐르게 하여라, 격동(激動)도 식히지 말으며, 또한 항거(抗拒)도 말고 그저 느리게, 제 맘에 맡겨 사람의 일되는 설움의 골짜기로 스며 흘러 기쁨의 산(山)기슭을 여돌아, 넓다란 허무(虛無)의 바다속으로 소리도 없이 고요히 흐르게 하여라.
그리하고 언제나 제 맘대로 흘러가는 `때' 그 자신(自身)으로 하여금 너의 앞을 지나게 하여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먼 후일(後日)
사나이의 생각은 믿기 어렵고 아낙네의 사랑은 변키 쉽다고 우리들은 모두 다 한숨지우나 먼 후일(後日)에는 그것조차 잊으리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소월 시인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외 5편 (0) | 2019.10.11 |
---|---|
오장환 시인 / 나의 길 외 2편 (0) | 2019.10.10 |
김소월 시인 / 야(夜)의 우적(雨滴) 외 4편 (0) | 2019.10.10 |
오장환 시인 / 귀향의 노래 외 3편 (0) | 2019.10.09 |
김억 시인 / 내 설움 외 3편 (0) | 2019.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