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시인 / 귀향의 노래
굴팜나무로 엮은 십자가, 이런 게 그리웠었다 일상 성내인 내 마음의 시꺼먼 뻘 썰물은 나날이 쓸어버린다 깊은 산발에서 새벽녘에 들려오는 쇠북 소리나 개굴창에 떠나려온 찔레꽃, 물에 배인 꽃향기.
젊은이는 어디로 갔나, 성황당 옆에…… 찔레꽃 우거진 넌출 밑에 뱀이 잠자는 동구 안 사내들은 노상 진한 밀주에 울고 어찌나, 이곳은 동무의 고향 밤그늘의 조금 따라 돛단 어선들은 떠나갔느냐 가까운 바다 건너 작은 섬들은 먼 조상이 귀양 가서 오지 않은 곳 하늘을 바라보다 돌아오면서 해바라기 덜미에 꽂고 내 번듯이 웃음 웃는 머리 위에 후광을 보라
목수여! 사공이여! 미장이여! 열두 형제는 노란 꽃잎알 해를 좇는 두터운 화심(花心)에 피는 잎이니 피맺힌 발바닥으로 무연한 뻘 지나서 오라.
춘추, 1941. 7
오장환 시인 / 길손의 노래
입동(立冬)철 깊은 밤을 눈이 나린다. 이어 날린다. 못 견디게 외로웁던 마음조차 차차로이 물러 앉는 고운 밤이여!
석유불 섬벅이는 객창 안에서 이 해 접어 처음으로 나리는 눈에 램프의 유리를 다시 닦는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 그리움일래 연하여 생각나는 날 사랑하던 지난날의 모든 사람들 그리운 이야 이 밤 또한 너를 생각는 조용한 즐거움에서 나는 면면한 기쁨과 적요에 잠기려노라.
모든 것은 나무람도 서글픔도 또한 아니나 스스로 막혀 오는 가슴을 풀고 싸늘한 미닫이 조용히 열면 낯선 집 봉당에는 약탕관이 끓는 내음새 이 밤따라 가신 이를 생각하옵네 가신 이를 상고하옵네.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깽
깽이 있다. 깽은 고도한 자본주의 국가의 첨단을 가는 직업이다. 성미 급한 이 땅의 젊은이는 그리하여 이런 것을 받아들였다. 알콜에 물 탄 양주와 댄스로 정신이 없는 장안의 구석구석에 그들은 그들에게까지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 여기와는 상관도 없이 또 장안의 한복판에서, 이 땅이 해방에서 얻은 북쪽 38도의 어려운 주소(住所)와 숱한 `야미'꾼으로 완전히 막혀진 서울길을 비비어 뚫고 그들의 행복까지를 위하여 전국의 인민대표들이 모였다는 사실을……
그러나 깽은 끝까지 직업이다. 전국의 생산이 완전히 쉬어진 오늘에 이것은 확실히 신기한 직업이다.
그리하여 점잖은 의상을 갖추운 자본가들은 새로이 이것을 기업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번창해질 장사를 위하여 `한국'이니 `건설'이니 `청년'이니 `민주'니 하는 간판을 더욱 크게 내건다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 / 나 사는 곳
밤늦게 들려오는 기적 소리가 산짐승의 울음소리로 들릴 제, 고향에도 가지 않고 거리에 떠도는 몸은 얼마나 외로울 건가.
여관방의 심지를 돋우고 생각 없이 쉬고 있으면 단칸방 구차한 살림의 벗은 찬 술을 들고 와 미안한 얼굴로 잔을 권한다.
가벼운 술기운을 누르고 떠들고 싶은 마음조차 억제하며 조용조용 잔을 노늘 새 어느덧 눈물 방울은 옷깃에 구르지 아니하는가.
`내일을 또 떠나겠는가' 벗은 말없이 손을 잡을 때
아 내 발길 대일 곳 아무데도 없으나 아 내 장담할 아무런 힘은 없으나 언제나 서로 합하는 젊은 보람에 홀로 서는 나의 길은 미더웁고 든든하여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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