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 / 봄비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닯이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부귀 공명
거울 들어 마주 온 내 얼굴을 좀 더 미리부터 알았던들 늙는 날 죽는 날을 사람은 다 모르고 사는 탓에, 오오 오직 이것이 참이라면 그러나 내 세상이 어디인지? 지금부터 두여들 좋은 연광(年光) 다시 와서 내게도 있을 말로 전보다 좀 더 전보다 좀 더 살음즉이 살는지 모르련만 거울 들어 마주 온 내 얼굴을 좀 더 미리부터 알았던들!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부모(父母)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비단 안개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요,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마 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엇에 취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요, 영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생각은 내가 무엇하려고 살려는지? 모르고 살았노라, 그럴 말로 그러나 흐르는 저 냇물이 흘러가서 바다로 든댈진댄. 일로 쫓아 그러면 이내 몸은 애쓴다고는 말부터 잊으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그러나, 다시 내 몸, 봄빛의 불붙는 사태흙에 집 짓는 저 개아미 나도 살려 하노라, 그와 같이 사는 날 그날까지 살음에 즐거워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뜻이면 오오 그러면 내 몸에는 다시는 애쓸 일도 더 없어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산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不歸), 다시 불귀(不歸), 산수갑산에 다시 불귀(不歸).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 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진달래꽃, 매문사,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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