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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인 시인 / 키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16.

조정인 시인 / 키스

 

 

그때, 나는 황홀이라는 집 한 채였다

 

램프를 들어 붉은 반점이 어룽거리는 문장을 비췄다 인화성이 강한 두 개의 연료통이 엎어지고 하나의 기술이 탄생했다 두 점, 퍼들대는 얼룩은 일치된 의지로 서로에게 스미었다 무풍지대에서도 불꽃은 기류를 탔다 불꽃은 불꽃을 집어삼키며 합체됐다 불꽃 형상을 한 혀에 관한 속설이 꿈속에서 이루어졌다 한 줄, 문장이 타올랐다 나는 심연처럼 깊게 타르처럼 고요하게 끓을 것이다

 

시집 『사과 얼마에요』 (민음사. 2019) 중에서

 

 


 

 

조정인 시인 / 입들

 

 

홍로가 들어갔다. 매장에는 새로 어리둥절한 사과가 진열됐다. 다른 사과는 내 취향이 아니다. 그래도 사과가 아닌가. 사과를 한 입 베물었다. 온몸으로 구강인 사과가 몰려온다. 사과들의 식욕을 누가 다 감당하랴. 일만ha의 초원과 석양, 일만 톤의 편서풍과 폭설, 일만 톤의 우기와 건기를, 일만 파운드의 산책자의 뇌를 먹어치우는 사과. 일 만 페이지의 구약에서 신약을 곧장 먹어치운 사과의 소화기관은 또 얼마나 유구한가. 그 중에 하느님의 물병이 흘린 새벽이슬을 선호한 사과의 취향을 나는 경배한다. 이슬 속엔 그해, 실과의 단맛을 결정하는 별의 성분이 있다. 사과가 사과인 사과는 조금 억울하다. 사과라는 천진한 장르에 대해 근엄하게 접근한, 부록 쓰는 일로 그 늙은 학자는 오늘 아침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일생, 사과라는 텅 빈 구멍만을 들여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사과를 닫았다. 그러고 보니 축사라는 이름의, 사뭇 점잖은 사과들이 몰려오는 계절이다. 어제는 두개골만 들고 나온 사과a와 식사자리를 가졌다. 나머지 사과들은 그의 열렸다 닫히는 구강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구취는 너무 쉽게 그의 취향을 들키고 있었다, 그의 난간에 간신히 기대어.

 

시집 『사과 얼마에요』 (민음사. 2019) 중에서

 

 


 

 

조정인 시인 / 무성한 북쪽

 

 

불가측 그늘의 나라 부재를 제곱하면 무성해지는 당신 길의 전면으로

폭설이 들이쳐 상제나비 날아간 방향을 놓치고 마네

 

촛대를 들고 무너진 사원 뒤뜰을 걷네 부재의 그림자 일렁이는 돌담장

세 겹, 성근 그늘 귀퉁이를 당겨 불꽃에 사르면 무슨 빛깔 재가 남나

 

염료를 구하러 온 눈먼 염색공

수런거리는 어스름 속으로 나는 스며들어

 

차가운 촛농이 발등에 떨어지네, 모든 색들의 불꽃은 메아리로 흩어져라

가늘게 떠도는 한숨, 흰빛만 남아

 

손끝에 만져지는

고요를 사른 보드라운 재

 

색과 소리, 모든 몸짓과 말의 바탕이던

 

당신이 두고 간 마지막, 텅 빈 색을 상자에 담아 왔네

 

떠난 뒤에 무성해지는 사람이 있네, 왼발 엄지발가락 발톱이 비어

내 안의 검은 악기를 타는

 

시집 『사과 얼마에요』 (민음사. 2019) 중에서

 

 


 

조정인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98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과 『장미의 내용』, 『사과 얼마예요』 그리고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