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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창갑 시인 / 고향 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16.

문창갑 시인 / 고향 집

 

 

나 지금 아우라지 정선에 와서

임종 직전의

폐가 한 채 문병하는 중입니다

 

억새와 거미줄, 그리고

함부로 살 찢고 다니는 바람에 점령당한

스산하고 가련한 폐가지만 이 집도 예전엔

한 가족이 슬어낸 하나한 추억을 머금고 있었을

심줄 푸른 고향 집이었습니다

무조건 받아주고, 무조건 안아주던

고향 집, 아버지와 어머니 선산에 누우신 후

사람 냄새 사라지니

빠르게 폐가 되었지요

 

제 몸의 문이란 문 죄다 열고

집은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저리 숨기 잦아지는 쇠잔한 몸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요  

 

폐가 된 고향 집은 애면글면 버티어보지만

결국은 와르르 무너지며 집의 일생 마칠 것이니

타관 떠도는 자식 놈들 훗날엔 필경

저녁놀에 울먹울먹 얼굴 묻고

고향 집의 살냄새 사무치게 그리울 것입니다

그러다 그러다

 

어둠이 밀물지는 생의 오후 어느 날엔

불현듯 돌아가고 싶겠지요 돌아가서

버리고 온 고향 집 식은 아궁이에 다시금

군불 지피고 싶겠지요  

 

고향 집 없는, 너무 늦은 그때

 

계간 『문학마을』 2007년 가을호 발표

 

 


 

 

문창갑 시인 / 거미에게 무릎 꿇다

 

 

쌀 씻으러 가다가

주방 창문 안쪽을 점령하고 있는

거미줄을 또 만난다. 이제

내 손은 자동이다.

신문지 돌돌 말아 단번에 후려치니

거미줄에 걸려 있던 아침 햇살들

바닥에 후두두 떨어진다. 상황 끝.

아침은 다시 환하게 밝아지려고 하는데

어라? 어딘가에 숨 돌리며 숨어 있었을

거미 한 마리 어느새 기어 나와

막가파의 우둔함으로 이제는

당당하게 거미줄을 치고 있다.

갑자기 저 작은 生의 무모한 전의(戰意)가

무섭고 안쓰럽다.

어떤가, 맑고 찬 한 잔의 얼음물처럼

내 마음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거미줄이 불러내는 스산함도

견디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정말 안 될 일인가, 벼랑 끝에서 버티는

저 작은 生의 전의(戰意) 앞에 한 번쯤은

내가 먼저 무릎 꿇어주면.

 

나는 지금 거미줄 못 본 척 흥얼흥얼 쌀을 씻고

거미는 지금 뻘뻘 땀 흘리며 튼튼한 거미줄을 치고

거미줄 있으나 없으나 아침은 환하고.

 

한국작가회의 2013년 『내가 뽑은 나의 시』 발표

 

 


 

문창갑 시인

1989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으로  『코뿔소』,  『빈집 하나 등에 지고』, 『깊은 밤 홀로 깨어』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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