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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종규 시인 / 어린 별들이 가득한 창공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7.

송종규 시인 / 어린 별들이 가득한 창공에서

 

 

  빛으로 뭉쳐진 하얀 밥을

  어린 벌레들이 파먹고 있는 봄날의 변두리에서

 

  부드러운 바람은 파문 져 내 안으로 스며들기도 했는데

  공중 높이 슬픔을 매달고 수많은 부표들이 떠 있기도 했는데

 

  그날 나는 극장에 있었고

  그날 나는 사막의 한 가운데 있었고

  그날 나는 수초들이 무성한 협곡에 있었고, 그날 나는

  당신이 없는 공원의 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극장의 B열 27번은

  적나라했다 사무침이 적나라했고

  굴곡 많은 격정의 삶이 적나라했고

  낡고 헐렁한 창문의 적요가 적나라했다

 

  누군가 절체절명의 질곡에 서있고

  누군가 화면으로 구겨져 들어가 싸늘한 밥을 씹는다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저녁과 나비는 고전이다

  세상의 모든 당신과 세상의 모든 침묵은 고전이다

 

  그날 나는 극장에 있었고

  그날 나는 불운한 예감으로 부글거리는 상수리나무 숲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날 나는 당신이 없는 바닷가를 헌 신문지처럼 서성였다

  한 시대가 흘러가고 있었다

 

  화면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주인공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기도 전에

  모래바람이 입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당신이 없는 첫 저녁이 까치발을 들고

  아름다운 봄날의 끝을 건너가고 있었다

 

  어린 별들이 가득한 창공에서 빛들이, 튀고 있었다

 

월간 『유심』 2015년 6월호 발표

 

 


 

 

송종규 시인 / 의자

 

 

  아주 잠시 다섯 시에 머물다가 흘러가는 손처럼

 

  빨간 사과가 허공에 획을 그으며 실려나간다

 

  당신이란 결국 한 컷의 허구였던 것

  당신이란 결국 한 생애의 불편하고 낡은 의자였던 것

 

  손뼉을 치거나 머리핀을 꽂을 때 마다 자욱하던 빛들의 막무가내를

  한 날의 어느 페이지에도 끼워 넣을 수 없는 캄캄한 생의 안팎

 

  아주 잠시 여섯 시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어깨처럼

 

  유리창을 구기며 물의 발굽들이 흘러내린다

 

월간 『현대시학』 2015년 3월호 발표

 

 


 

송종규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둥지, 1990), 『고요한 입술』(민음사, 1997),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시와반시사, 2003), 『녹슨 방』(민음사, 2006),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민음사, 2015)이 있음. 2005년 대구문학상 과 2011년 제31회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2013년 제3회 웹진『시인광장』 시작품상, 2015년 제13회 애지문학상, 2017년 제10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