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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세상에 비 내렸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

김왕노 시인 /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세상에 비 내렸다

 

 

우리 오래 참아왔던 말을 서로에게 강물처럼 흘러 보내자 한 호흡 두 호흡 뜨거운 우리의 숨결이 되살아날 때

 

이 순간이 천벌을 가져오더라도 후회 없다며 빈 집의 아궁이 같은 마음에 군불을 떼듯이 생솔가지 같은 사랑의 말을 뚝뚝 분질러 넣을 때

 

어둠 깊어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무엇도 보이지 않고 후박나무 그늘마저 콜타르 같이 손에 척척 달라붙는 난리 중에 허연 달덩이 같이 네가 떠오를 때

 

끊어진 인연의 올을 하나 둘 이으며 끝없이 나부끼다가 찢어진 그리움을 한 땀 한 땀 깁던 네 섬섬옥수로 차가워진 내 손에 가만히 온기를 전해 올 때

 

발해로 가 우리의 꽃이 피고 우리의 하늘이 펼쳐지고 우리의 새가 우는 것을 보러가던 발길을 잠깐 멈춰 명아주 이파리에 얹힌 햇살 머금은 이슬방울을 보듯 고이 너를 볼 때

 

바람과 달빛이 오럴섹스로 부들의 귀두를 오래 핥아 참다못한 부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하늘로 부들의 씨앗을 쭉쭉 사정하듯 휘날리는 것을 우리 함께 볼 때

 

오동나무 아래 탯줄을 묻듯이 묻은 손톱이 오동나무 꽃잎으로 하나 둘 피어났다가 맨 땅을 수놓으며 뚝뚝 지는 소리 들릴 만큼 우리 예민해 졌을 때

 

살얼음 뜬 동치미 국물위에 별이 뜨던 씨족 마을의 밤과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강낭 꽃 보다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게 흐르던 마음을 우리 연모할 때

 

곳집에 붐비는 달빛과 빗소리로 꽃상여의 꽃이 더 소담스러워지고 선소리 앞세우고 너울너울 북망산천 간 할머니 할아버지 개 복숭아 꽃 피니 잘 개실 거라고 우리 입 모을 때

 

광활한 역사 위에 뜬 별이 북방여치 울음 위에도 뜨고 문턱을 넘어 자갈밭으로 간 아무르장지 뱀 꼬리 위로도 뜨고 우리가 벗어둔 신발 위에도 뜰 때

 

그 많은 순간순간이 닥치고 멀어지고 할 때 너와 내가 순간순간 닿을 때마다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었다. 가까워질수록 더 아득해지는 안타까움으로 더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죽음으로 가는 휘어진 길이라 해도 둘이는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끔 뜨거운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듯이 들려오던 빗소리,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세상에 비가 내렸다. 온톤 세상이 푸르러져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8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옛 영일군 동해면 일월동)에서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체인점〉으로 당선.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신춘문예출신 6인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한성기 문학수상집』 『그리운 파란만장(세종도서 선정)』,『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세종도서 선정)』,『게릴라(2016년 디카시집)』, 『이별 그 후의 날들(2017년 디카시집)』등이 있음.

2003년 제 8 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 년 제 7 회 박인환 문학상, 2008 년 제 3 회 지리산 문학상, 2016년 제 2회 디카시 작품상 2016년 수원문학대상, 2017년 한성기 문학상과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 등 수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금 등 5 회 수혜. 현재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역임, 현재 계간 『시와 경계』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