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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란 시인 / 버뮤다 제라늄
사차원의 입구가 열리고 있다 배도 비행기도 빨려 들어가는 삼각해역, 한 때 벽이었던 파도였던 수많은 얇고 향기로운 입구들 열리고 있다
삼차원에서 조금 더 놀다가겠어 내가 사랑한 사람 몇 그곳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때 한쪽 발만 몰래 빠져나와 대열을 이탈했을까
혼자 남은 삼차원의 세계는 재미있다 못해 외롭고 슬프고 심지어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아 이 아름다움 차마 홀로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은 단박에 알아차린다 아무리 숨겨도 나의 한쪽 발이 사차원에 걸려있다는 것
자주 절름거리고 비틀거리는 나의 고독을 춤이라 오해한다
다 춰, 더 춰, 더 춰 봐, 박수소리에 고독을 에너지로 쓰기 시작했을까
제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 광대 이 우스꽝스러운 춤 그칠 수가 없다 박수소리의 환영 속에서 춤추고 춤추고 또 춤추고 춤추고 춤추다 쓰러질 때까지
허리케인 회오리쳐 피어나는 꽃의 해역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은 모두 병이 된다
계간 『포지션』 2019년 여름호 발표
최정란 시인 / 해먹
아늑하네 이 태반은, 부드럽고 느리네 이 몸짓은, 흘러가네 따뜻한 시간이, 두 팔로 몸을 감싸네 심장을 감싼 양막 속에서, 다리를 오그리네 물방울처럼, 몸을 웅크리네 숨 쉬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태아의 자세로 돌아가네 반쯤 열린 막 사이로, 눈부시네 들이붓는 햇살, 바람이 미는 대로 흔들리네 바람의 자궁 속 번데기, 그네를 타네 나비의 외곽이 되어 있을까 한 숨 길게 자고 나면, 아득하네 이 하염없는 시간은, 나는 곧 태어날 것이네 뻣뻣한 가구에 맞추라 가구라는 합금의 신에게 경배하라 녹슨 무릎을 바닥에 굽히라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세워질 것이네 바람은 더 이상 무른 뼈를 흔들지 않을 것이네 자주 떠돌고 이따금 삐죽삐죽 울퉁불퉁한 영혼을 세상은 더 이상 안아주지 않을 것이네 출렁거릴 액체는 없을 것이네 자주 흘러내리는 자세, 웅크리기 좋아하는 등, 사무치네 이 슬픔은, 가구의 규칙에 따를 것이네 제도적 묵시적 틀에 갇히고 갇힐 것이네 누구의 변호도 없을 것이네 가구의 규격에 맞추어 몸을 굽히고 눕히기를 반복할 것이네 무정형의 영혼은 각이 많은 고체가 될 것이네 융통성 없고 완고한 고집불통 가구가 될 것이네 마침내 위태로운 모서리가 될 것이네
계간 『시인시대』 2019년 봄호 발표
최정란 시인 / 그의 애인은 일기예보 아나운서
우기에서 건기로 건너가는 모래 속에서 죽은 물고기 뼈가 뉴스를 보고 있다
지난 생에 이곳은 바다였다는 듯, 문득 검은 지느러미를 멈추었다는 듯, 바다의 날씨가 마지막 양들을 기다릴 때
발끝에 채이는 양의 해골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사막화가 진행되는 초원을 거쳐 삶의 국지성 호우와 백년만의 폭설, 뿌리까지 휩쓸어가는 대해일을 겪은 벼랑이다
아침은 안개, 비행기 이륙이 지연될거야 유선형의 오후는 땡볕, 결국 어두워질거야
신기루가 그려놓은 늪을 삼킨 죽은 양의 입에서 토마토 즙처럼 끈적하게 잠언의 예보들이 흘러나온다 옆줄로 잴 수 없었던 심연의 깊이
친절한 봄바다는 예정된 배신을 준비하지 아침을 믿고 얇게 입으면 저녁에 떨게 돼 그 화창한 아침 어떻게 저녁의 먹구름과 회오리바람을 예측할 수 있을까
일교차는 하루도 방심하지 못할 몸의 자연이지만 사과에 단단한 꿀이 고이는 동안 얇은 인내심을 여러 겹 겹쳐 입어야해
순한 양들이 바다안개의 베일 위에 그려보이는 삶의 날씨, 종잡을 수 없지만 죽은 양들은 뿔을 들이밀지 않는다
안심해, 이윽고 헐거운 계절이 멀지 않으니 뉴스 끝을 완성하는 긴 우산은 버려도 좋아
팽팽하게 부푼 몸의 곡선이 터질 듯, 전신으로 보여주는 일기 지상의 욕망의 날씨, 맑 음,
방금 양의 몸을 떠나 온 양떼구름을 몰고
계간 『사이펀』 2019년 봄호 발표
최정란 시인 / 내게 풀밭 같은
웃음은 오래 된 텐트 같아, 낡고 자주 비어 있어요 그 안에 들어가면 아늑해요 웃음을 뒤집어 보면 밖이 비춰 보일지도 몰라요 날깃날깃 구멍이 날 것 같아요 이미 구멍이 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빠지는 쓴웃음이 이따금 피식거릴 리 없잖아요 웃음은 낡은 옷들을 이어 붙였을까요 겉보기에 매끈한 웃음의 안감은 빠르게 낡아요 한참 웃다보면 먼지와 하품이 나요 웃음으로 많은 것들을 숨겨요 쑥스러움도 간절함도 모두 웃음으로 숨겨요 그 가운데 울음을 제일 많이 숨겨요 울음은 웃으라고 자꾸 웃으라고 웃음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워요 울음을 숨기기에 웃음만한 곳이 없지만, 웃음은 튼튼한 벽돌집이 아니어서, 낡은 게르처럼 계절마다 울음은 웃음의 자리를 옮겨주어야 해요 풀이 많은 곳을 찾아서, 혼자 울기 좋은 곳을 찾아서, 늦은 휴가에 숨어 들어간 사막처럼 울기 좋은 하늘을 찾아서, 웃음 속에서 오래 울어요 마른 말똥을 태워 데운 따뜻한 공기가 천정으로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당신 너무 멀리 있어서, 당신 없는 하늘에 별이 너무 많아서
계간 『포지션』 2019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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