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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혜미 시인 / 사라진 입술과 두 개의 이야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6.

이혜미 시인 / 사라진 입술과 두 개의 이야기

- 진주에게

 

 

근심어린 이름을 물고 조개는 바다를 건너간다

 

조개는 사실 바다의 새였지

하나라 여겼던 날개가 둘로 나뉘면

보석인 줄도 몰랐던 비참이 눈을 뜬다

 

두려운 날개를 단단히 접고

상처받을 준비가 된 입술로

깃털 속에 숨겨두었던 날카로움으로

 

조금씩 몸을 얻어가는

풍등처럼

 

맺힌 잠시의 연결됨을 매혹이라 부른다지만

더 큰 영롱과 황홀이

헤어진 몸의 안쪽에 고루 발렸다

 

풍등이 소원의 힘으로 인간의 별이 되듯이

너에게도 타오르는 슬픔의 검불이 있어서

 

비참을 껴안으며 조개는 날아오르고

마음에도 단단한 껍질을 심어두려 한 쪽 날개를 버려가며

수면을 향해 몸을 열었다

 

날개를 두고 왔다 해서 하늘을 버린 건 아니지

 

흉 진 자리에 은근한 파문이 고여들듯

하나의 품을 떠나보낸 조개가

빛나는 그릇이 되어 바다를 안듯이

귀한 구슬이 입으로 잠겨드니

세계의 안쪽이 사랑으로 그득해진다

 

포옹의 넓이가 조금씩 부풀어갈 때

뜨겁고 환한 바다의 입술이 되어

한껏 가벼워지겠지

하나이자 둘인 몸으로 나아가겠지

 

멀어짐으로서 완성되는

 

빛의 자리로

 

계간 『시산맥』 2019년 여름호 발표

 

 


 

 

이혜미 시인 / 종이를 만지는 사람

 

 

당신은 지나치게 조심히 걷는군요.

나무를 꿈꾸게 하려고.

 

오늘의 이면지들이 숲의 어깨 위에 엉켜 있네요. 지나오는 동안 보셨겠지요. 폭설에 물든 흑목련 나무가 바닥에 새까만 꽃잎들을 엎질러둔 것을. 그건 잠시의 망설임이 담긴 문장입니다.

 

차이와

간격에 대한.

 

나무가 눈멀어 자신만의 어둠 속에 잠겼다지만, 그는 잎사귀의 눈꺼풀과 내뻗은 가지로 세계를 다시 얻지요. 눈송이가 우리의 손끝에서 태어나듯이.

 

저녁을 천천히 더듬으면 낯익은 별들이 떠오르고… … … … 한 번의 스침으로도 생겨나는 마음의 요철들. 그 짤막한 배열의 모스부호들을 건져내려 눈을 감습니다. 나무의 속내까지 몰려드는 새로움을 흰 점자들로 이루어진 백지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흑목련의 기억을 일깨우는 지금, 당신은 종이를 만지는 사람입니다. 종이에게 경험을 주려 오래도록 걷는 사람입니다.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나무의 기억들이 갈피마다 쏟아지네요.

 

정든 파본처럼.

 

계간 『천년의 시작』 2019년 여름호 발표

 

 


 

 

이혜미 시인 / 약속을 내일로 미루어도 되겠습니까

 

 

밤의 귀에 대고 오늘은 잠시만 자리를 비켜줄래, 정중하게 부탁한다면 무사히 이 방을 지킬 수도 있었을 거야. 우리에게는 보다 많은 색깔들이 필요했으니까.

 

우리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네. 잠들었어? 아직. 신호들만 겨우 나누었지. 불안하고 안온한 방식으로. 언제든 일어나 밤의 스위치를 눌렀더라면, 서로의 손톱 밑 분홍이 어떤 채도를 가졌는지 함께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겨울 유리창에게 한번쯤 전화를 걸어보았다면. 그는 선선히 우리를 위해 겉옷을 벗고 시계를 풀어 버렸을 거야. 꼬리깃이 작은 새들과 함께 자작나무의 괴상한 습벽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겠지.

 

그러지 못했어. 밤마다 두 눈을 어제 속에 담가두고 귀마개를 꼈지. 너무 많은 시간들이 생각의 곁을 떠나는 동안.

 

달의 위성에게 긴 편지를 적고, 개기월식에 대한 서적들과 잠수경을 담은 선물 상자를 보내주었다면, 그는 달의 바다 속으로 깊어질 수 있었겠지. 그러면 매번 지구를 향해 윙크하던 그 외로운 눈꺼풀에 키스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컵을 들어야겠다. 아마도 밤은 기꺼이 자리를 비워주었을 거야. 오래 목말랐던 고무나무에게 작은 부탁을 해야지. 잠깐 이야기 좀 괜찮아? 실은,

 

계간 『천년의 시작』 2019년 여름호 발표

 

 


 

이혜미 시인

198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창비, 2011)과 『뜻밖의 바닐라』(문학과지성사, 2016)가 있음.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