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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성현 시인 / 종이인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6.

박성현 시인 / 종이인간

 

 

연필이 뭉툭해질 때까지

나는 공장과 굴뚝과 철조망을 그렸다

사람들이 웃으며 연기 속을 반복해서 지나갔다

봄과 겨울이 지나고 매일 코스모스가

피었다 나는 쉽게 찢어졌지만

 

나는 매일 새로 연필을 깎고 공장을 그렸다 자욱한 굴뚝 연기를 헤집고 새가 날았다 사람들은 웃으며 ​코스모스를 바라봤다 공장의 봄과 공장의 여름이 지나가고 공장의 폭설이 내려 쌓였다 새로 깎은 연필이 뭉툭해질 때까지 끈질기게 당신이 찾아왔다 나는 매일 쉽게 찢어졌다

 

공장에 코스모스가 피었다 코스모스가 피어서 공장이 환했다 환한 코스모스 위로 눈이 쏟아졌다 눈은 까닭 없이 멀고 따뜻했다 나는 근시에다 지독한 야맹증 환자라 저녁이 되면 걸을 수조차 없었지만 코스모스를 보기 위해 매일 서둘러 공장에 갔다 걸을 때마다 나의 눈과 코와 귀는 코스모스를 닮아갔다 나도 모르는 내 의지였다 이주민 노동자들이 밤새 프레스를 눌러야 하는 이유도 코스모스가 피고 흔들리는 의지였다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나는 내 몸속에서 새를 꺼냈다* 새는 날개를 펴고 바다 끝까지 날아갔다 노동자들이 새벽 근무를 마치고 공장을 나왔다 물끄러미 코스모스를 쳐다봤다 몽골과 파키스탄, 네팔과 예멘까지 지도에도 없는 고향이 환했다 지도에는 없지만 새는 반드시 날아갔다 밤새 당신을 뒤척이고도 다음날 일찍 공장에 갔다 연필이 뭉툭해질 때까지

 

나는 쉽게 찢어졌다

 

* 문정희 시인의 문장. “내 몸속의 새를 꺼내주세요”

 

계간 『시산맥』 2019년 여름울호 발표

 

 


 

 

박성현 시인 / 팽목

 

 

 갑자기 찾아온 새들이 시끄러웠다 모여서 차가운 몸을 부비거나 그렁그렁한 눈물을 참고 있었다 나무의자를 내어주고 저만치 비켜섰다 우체국에서 엽서를 잔뜩 샀다 밤마다 당신에게 부칠 종이배를 만들었다 주소가 없으니 가라앉을 뿐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새들과 함께 밥과 술을 나눠먹었다 벚나무 밑에 모여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고 순한 새들이,

 

창백하고 순한 눈을 뜨고 모두 떠나버리는 지독한 꿈을 꿨다 종이배를 다시 부치고 나는 내 몸의 벼랑에서 뛰어내렸다

 

계간 『파란』 2018년겨울호 발표

 

 


 

 

박성현 시인 / 우체국

 

 

엽서를 쓰고 우표를 붙였다

짧고 가는 문장이 두 줄로 포개져 있었다

읽을 수 있을까, 이 비틀거리는

새의 말을 쓸쓸한 발톱이 휘갈겨 쓴

마음의 잔해들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 갔다

가다 멈추고 공원 근처

가까운 편의점에서 생수와 빵을 샀다

벚나무 아래 나무의자에는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

녹을 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엽서를 꺼내 그 두 줄의 문장에서

희고 간결한 새를 꺼내 날려 보냈다

 

격월간 『시사사』 2018년 5~6월호 발표

 

 


 

박성현 시인

문학박사. 2009년 《중앙일보》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이 있음. 2013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9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서울교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