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낙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6.

김왕노 시인 / 낙과

 

 

  한 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는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어차는 햇살에

  한 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째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 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계간 『문학과 사람』 2019년 여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리아스식 사랑

 

 

내 말이란 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그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섬입니다. 당신은 섬의 어법을 모르고 내 어법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어법을 모릅니다. 당신의 주소도 모릅니다.

 

내 마음은 저 바다 위 뚝뚝 지는 동백 꽃잎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동백꽃의 어법을 모르고 동백 꽃잎을 싣고 먼 당신을 찾아갈 물결의 어법도 모릅니다. 동백 꽃잎을 대하고 속삭일 당신의 어법을 나도 모릅니다.

 

하나 당신의 어법에 익숙해 질 때까지 나는 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입니다. 수없이 몰아쳐 오는 태풍에 동백 꽃잎 같은 그리움만 뚝뚝 떨어뜨리며 내 어법에 당신이 익숙해 질 때까지 저물지 않는 섬입니다.

 

비록 내가 당신을 향해 가진 사랑이란 들쑥날쑥한 리아스식 사랑이지만 우리의 모국어, 사랑의 어법에 우리의 입술이 물들 때까지 난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시집 『리아스식 사랑』(시선사, 2019) 중에서

 

 


 

 

김왕노 시인 / 바다 약국

 

 

‘바다 약국’에 가 보셨습니까? 이 깊은 도시 한가운데 닻을 내린 바다 약국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유리창이 푸른색으로 선팅된 ‘바다 약국’, 진열장마다 바다를 정제한 알약, 바다가 든 튜브의 연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난 그 주인을 자세히 모릅니다. 서해 섬 어디에서 왔는지 영일만이나 묵호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바다 약국’으로 간판을 내건 그는 이미 나에게 바다입니다. 팔에 닻의 문신이 없어도 그는 나에게 바다 사나이입니다.

 

‘바다 약국’에 가면 가끔은 거리로 헤엄쳐 온 인어를 볼 것입니다. 조용히 핸드백을 열면 그 안이 살짝 보이는 그럴 때마다 난 해마의 울음을 듣습니다. 누가 ‘바다 약국’으로 가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신 적 있습니까? 가끔은 물살보다 낮게 흘러와 귓속말로 무언가 주문하며 살짝 얼굴 붉히며 떠나는 솜털 뽀얀 소녀도 볼 것입니다. 달 푸른 밤 수면을 탁탁 치며 산란하는 고기떼의 생동감이 넘쳐나는‘바다 약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도 처방 내릴 수 없는 사연을 안고 폭설 속으로 길을 떠나고 지병을 안고 먼 고장으로 가는 밤 열차에 몸을 싣기도 하지만, 난 지금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파초 잎보다 더 큰 꿈의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며…… 바람 센 날 마음을 돛으로 올리고 뱃전 같은 그리움에 와 철썩이는 세월, 철썩임이 클수록 내 생은 즐겁기도 하고 난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두통을 호소하거나 일회용 반창고를 사는 사람마저 바다의 넓은 마음을 닮아 가는 ‘바다 약국’, 한번쯤 와서 본 적 있습니까? 깻잎 같은 그리움 몇 매달고 나 끝없이 흔들리며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시집 『리아스식 사랑』(시선사, 2019) 중에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옛 영일군 동해면 일월동)에서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체인점〉으로 당선.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신춘문예출신 6인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한성기 문학수상집』 『그리운 파란만장(세종도서 선정)』,『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세종도서 선정)』,『게릴라(2016년 디카시집)』, 『이별 그 후의 날들(2017년 디카시집)』등이 있음.

2003 년 제 8 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 년 제 7 회 박인환 문학상, 2008 년 제 3 회 지리산 문학상, 2016년 제 2회 디카시 작품상 2016년 수원문학대상, 2017년 한성기 문학상과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 등 수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금 등 5 회 수혜. 현재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역임, 현재 계간 『시와 경계』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