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왕노 시인 / 낙과
한 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는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어차는 햇살에 한 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째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 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계간 『문학과 사람』 2019년 여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리아스식 사랑
내 말이란 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그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섬입니다. 당신은 섬의 어법을 모르고 내 어법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어법을 모릅니다. 당신의 주소도 모릅니다.
내 마음은 저 바다 위 뚝뚝 지는 동백 꽃잎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동백꽃의 어법을 모르고 동백 꽃잎을 싣고 먼 당신을 찾아갈 물결의 어법도 모릅니다. 동백 꽃잎을 대하고 속삭일 당신의 어법을 나도 모릅니다.
하나 당신의 어법에 익숙해 질 때까지 나는 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입니다. 수없이 몰아쳐 오는 태풍에 동백 꽃잎 같은 그리움만 뚝뚝 떨어뜨리며 내 어법에 당신이 익숙해 질 때까지 저물지 않는 섬입니다.
비록 내가 당신을 향해 가진 사랑이란 들쑥날쑥한 리아스식 사랑이지만 우리의 모국어, 사랑의 어법에 우리의 입술이 물들 때까지 난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시집 『리아스식 사랑』(시선사, 2019) 중에서
김왕노 시인 / 바다 약국
‘바다 약국’에 가 보셨습니까? 이 깊은 도시 한가운데 닻을 내린 바다 약국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유리창이 푸른색으로 선팅된 ‘바다 약국’, 진열장마다 바다를 정제한 알약, 바다가 든 튜브의 연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난 그 주인을 자세히 모릅니다. 서해 섬 어디에서 왔는지 영일만이나 묵호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바다 약국’으로 간판을 내건 그는 이미 나에게 바다입니다. 팔에 닻의 문신이 없어도 그는 나에게 바다 사나이입니다.
‘바다 약국’에 가면 가끔은 거리로 헤엄쳐 온 인어를 볼 것입니다. 조용히 핸드백을 열면 그 안이 살짝 보이는 그럴 때마다 난 해마의 울음을 듣습니다. 누가 ‘바다 약국’으로 가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신 적 있습니까? 가끔은 물살보다 낮게 흘러와 귓속말로 무언가 주문하며 살짝 얼굴 붉히며 떠나는 솜털 뽀얀 소녀도 볼 것입니다. 달 푸른 밤 수면을 탁탁 치며 산란하는 고기떼의 생동감이 넘쳐나는‘바다 약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도 처방 내릴 수 없는 사연을 안고 폭설 속으로 길을 떠나고 지병을 안고 먼 고장으로 가는 밤 열차에 몸을 싣기도 하지만, 난 지금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파초 잎보다 더 큰 꿈의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며…… 바람 센 날 마음을 돛으로 올리고 뱃전 같은 그리움에 와 철썩이는 세월, 철썩임이 클수록 내 생은 즐겁기도 하고 난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두통을 호소하거나 일회용 반창고를 사는 사람마저 바다의 넓은 마음을 닮아 가는 ‘바다 약국’, 한번쯤 와서 본 적 있습니까? 깻잎 같은 그리움 몇 매달고 나 끝없이 흔들리며 ‘바다 약국’으로 갑니다.
시집 『리아스식 사랑』(시선사, 2019) 중에서
|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진혜진 시인 / 나비의 탄생 외 1편 (0) | 2019.12.06 |
|---|---|
| 최정란 시인 / 버뮤다 제라늄 외 3편 (0) | 2019.12.06 |
| 박성현 시인 / 종이인간 외 2편 (0) | 2019.12.06 |
| 이혜미 시인 / 사라진 입술과 두 개의 이야기 외 2편 (0) | 2019.12.06 |
| 김종원 시인 / 우리들의 생각 외 3편 (0) | 2019.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