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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길나 시인 / 언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7.

김길나 시인 / 언덕

 

 

피아노의 수평 건반이 수직 계단으로 수정 되었다

음계로 설계된 계단을 발이 연주하는 곳,

언덕을 오르는 음계가 가파르다

계단을 밟을 때, 음에서 사금파리가 번쩍인다

깨진 화음이 계단을 흔들었다

발에서 피어나는 안개 혹은 구름,

광풍을 밟아 쫓기듯 발이 빨라진다

숨이 차오르는 폴테시모의 고개로

반음의 비가가 솟구치는 검은 계단이 이어지고

시간은 언덕의 경사만큼 휜다

구부러진 계단은 오늘을 연주하지 못한다

어제에 도달한 발에 이미 생의 굴곡이

굳은살 인증으로 찍혀 있다

굳은 살에 내장된 기록이 펼쳐진 날,

눈물을 안고 통고의 소요를 넘어온 발의

파도가 모든 계단에서 심포니로 터져 나왔다

음표에 실려 밖으로 나온 물음표에

불이 켜진 것은, 어제와 오늘의 무경계인 현재가

계단 어디쯤에서 피어날 지를 자문한 까닭

 

자기 발을 찾아간 귀가 이제부터

발의 변주곡을 듣기 시작할 것이다

 

계간 『시와 경계』 2018년 겨울호 발표

 

 


 

 

김길나 시인 / 저체중

 

 

당신의 발원지가 잊혀졌다

 

해가 뒤집어 쓴 가면은 구름 성분,  

가면을 예찬하는 바람이 불어제쳤다

 

하늘에 없는 지도를 가져와

철새들은 겨울과 여름을 바꾸었다

 

지구 풍경을 날개에 베낀 새들이

밤이면 절경을 찾아 부리를 묻었다

 

날개를 펼친 하늘 길의 유랑이 환몽으로

붐볐다면, 날개를 접은 정착은

 

삶을 꿈으로 환치하는 잠으로의 입문이었던 것

 

오늘은 해를 따라 서쪽으로 넘어가는 중이고

너머에 있는 내일은 미지의 시간이므로

 

새떼가 떠난 빈 들판의 시계 바늘이

없음도, 있음도 아닌 0을 가리켰다

 

다만, 이유도 모른 채 흘러야 했으므로

아기들을 실어 나른 강물이 이곳에서 흘러나왔다

 

비가 내리지 않는 달의 계곡에

폐허를 사랑하는 이가 묻힌 날,

 

물 마른 나의 무게는 저체중이었다

 

월간 『문학공간』 2018년 12월호 발표

 

 


 

김길나 시인

1995년 시집 『새벽날개』로 등단하고 1996년『문학과사회』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빠지지 않는 반지』,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홀소리 여행』, 『일탈의 순간』, 『시간의 천국』과 산문집『잃어버린 꽃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