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다인 시인 / 검고 붉은 흘림체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7.

정다인 시인 / 검고 붉은 흘림체

 

 

눈부시다는 것 피 흘리는 일이다

 

낯설게 웃고

희미하게 우는

당신의 얼굴에서 해질녘이 시작된다

서서히 붉어지는 낯빛 속에 숨어 있는

저녁이 당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든다. 저녁은 스스로 소리를 삼키는 묵음

사라지고 있는 행간을 더듬는 것이다

 

해진 껍질 속에서 자꾸만 위로 위로

솟구치는 건 당신의 첫 줄이 쓰이는 방법,

 

어둠은 가장 고요한 비명이다

 

당신의 첫 줄에 담긴 묵음을 오래 씹어 저녁이 깊어진다

혀 위에 얹힌 쓰다, 라는 말 속에

봄밤이 흐르는 눈먼 당신의 흘림체와

저녁의 무채색이 함께 번진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오랫동안 허우적거린 당신 위로

흡혈의 시간이 쏟아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묵묵히 검은 피가 흐르는

당신을 붉다, 라고 말해야 할까

 

한 걸음씩 서서히 사라지는

당신이

걸쭉한 봄밤을 찍어

고독한 당신을 받아적는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쓸쓸하고 눈부신

검고 붉은 한 줄,

 

격월간 『시사사』 2019년 6~7월호 발표

 

 


 

정다인 시인

2015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자 k』(한국문연, 2017)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