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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렬 시인 / 각설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7.

이성렬 시인 / 각설탕

 

 

그 성채의 설계자는 바벨탑을 염두에 두지는 않은 듯하여, 천국을 향해 층층이 쌓아올리는 공법 대신, 허공에 중심을 띄우고 사방으로 방을 무한히 복제해 나갔다.

 

모든 색상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성곽의 입구는 보이지 않으며, 순백으로 탈색된 자에게만 열린다. 회색 심장을 가진 고독한 소설가가 성채 주변을 맴돌다가 절망한 적이 있다.

 

스스로 성을 떠난 주민은 한 명도 없었는데, 그것은 달디단 벽 때문. 아름다운 여름날, 외벽에는 물방울이 맺히는데, 눈을 가린 꽃의 요정들이 발코니로 삼아 소야곡을 부르기도 한다.

 

어디에도 거울이 없어, 만년에 비극적인 사상을 품은 화가는 조소하는 자화상을 순전히 상상으로 그렸다.

 

미로 깊숙한 곳, 안개의 방은 간혹 누군가의 통곡의 벽이 되는데, 그 내력을 기록하는 일은 금지되어

 

불순한 호흡을 멈추는 울트라스위트 가스실에서 누군가 내지른 비명은 즉시 소음으로 처리되었다.

 

서재를 빠져나온 철학자가 방황한 후, 생각하는 자세의 미이라로 백 년 만에 복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그곳, 일생동안 말없이 망원경을 들여다본 천문대장은 Sagittarius B2*에서 고당분의 벽돌들을 감지했는데, 머지않아 그 성운에 주민이 출현할 것임을 예측한 후 다시 입을 닫았다.

 

*Sagittarius B2 성운에서 당糖 분자가 발견됨 (Astrophysical Journal, 2008/9/20).

 

월간 『현대시학』 2009년 7월호 발표

 

 


 

 

이성렬 시인 / 게맛살에 대한 명상

 

 

그대가 흐린 국물 깊은 곳에 잠든 꽃게를 뒤적이는 눈부신 아침에, 내 고독한 냉장고 안에서 낡은 비닐 옷을 입고 늙어가는 게맛살을 떠올릴 것이다

 

그대가 무심히 꽃게의 가슴을 부술 때에, 빗줄기에 씻긴 풀꽃의 붉은 종아리들, 봄볕을 따라 무덤 사이로 멀어져가는 분홍 치마자락을 말할 것이다

 

죽은 피가 민둥산으로 굳은 해장국을 마주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열린 구름 사이 아침노을의 진심을 향해 한없이 다가가는 강물을 맞는

 

그날, 아름다운 그대가 활짝 웃으며 세상을 비껴 꽃게처럼 옆걸음 할 때에, 진실로 누군가의 단단한 삼두박근이 되기를 갈망하는 게맛살을 그리워할 것이다

 

모진 거리의 수레바퀴에 치인 빗장뼈 조각들과, 긴 이별을 고한 꼬리연, 안간힘으로 사라진 고드름의 핏자국을 찾아, 멀어가는 길 위에서

 

월간 『현대시학』 2010년 1월호 발표

 

 


 

이성렬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를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2002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모아드림, 2003)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등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副주간 역임.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