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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라 시인 / 검은 구두코에 기댄 달빛
어두운 입술 사이로 문장이 지나가지만 검은 구두 속에 강물이 흐른다는 말도 못하겠습니다
어둠이 내려오고 어둠이 번지는 것은 새벽이 사라져 버리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장을 물밑으로 놓아 보내던 날 자신의 그림자를 밟아야만 길을 걸을 수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가고 있는 것들은 죄 그렇더군요 다만 나무는 제 그림자를 밟지 않는 대신 아무데도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가 된 아이 나무가 된 길고양이 뿌리가 된 삶의 단단한 암초 뒤로 하루는
달빛이 검은 구두코에 제 등을 기대고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고된 하루를 돌이키며 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림자도 없는 달빛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하 멀어서 조용히 기댈 그림자가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구두 속엔 세상의 모든 뒷골목으로 가득한 주름들 종일 외근 뛴 날의 팩소주와 겔포스 냄새 변기 앞에서 여러 번 짓이겨 끈 담뱃재 우울이 삼켜버린 광채와 정작 짓이겨야 할 것들은 못 이기고 자신만이 가루가 돼 버린 하루가 다 들어 있습니다
어둠이 어둠에 기대어 도미노로 무너지는 동안
달빛은 채워지지 않는 제 빛에 갇힌 채 검은 구두코에 걸터앉아서 몸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것을 신고 걸어 보는 삶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멀리 장례미사가 거행되는 종소리에 쫓겨 더 이상 갈 데 없는 어둠이 나를 나무로 꽝꽝 박아 넣던 밤이었습니다
계간 『시와 반시』 2019년 봄호 발표
최세라 시인 / 네온드 아이
담배를 툭 치면 불 붙은 재가 허공을 날았다 당신 눈앞에 반딧불이가 오래 멈춰 있다
구름이었던 적 있냐고 묻는다면 폭우 속으로 모시고 가겠다 지금은
가까스로 넘어지는 2시 11분 34분엔 편지를 완성하고 36분에 우편함에 넣어야지 행인들이 즐거운 껌을 씹으며 자신의 눈물자국을 숨기는 걸 모르는 척 해야지
물은 보폭이 좁고 다정하죠 그러나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많은 물은 조심해야 해 당신에게 안부를 적으면서 주의사항을 곁들인다 삶은 콩껍질이 곁들여진 돈까스 요리처럼
이제 나는 갈색 소스처럼 사라지려 해 보리국수를 삶을 때 차가운 물을 두 번 부으면 저녁이 오듯 조금은 단단하고 서러운 신발을 끌며 무음모드로 변환되지
함께 찍은 사진마다 눈이 붉었다
월간 『시대』 2019년 4월호 발표
최세라 시인 / 개를 데리고 떠나는 여자에 대한 소묘
메리는 -4 콤마 -8 자리에서 태어났고 한 번도 좌표평면을 벗어난 적 없고 뜬장 위를 걷느라 지금
발바닥이 +6 콤마 0으로 이동한다
당신은 침을 삼킨다 눈높이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바닥
0콤마 0의 위치에 물그릇을 얹어 준다
쉿, 너를 훔치러 왔어 나는 개 짖는 소리고 연습으로 완성할 수 없단다 서걱서걱 초승달로 이 집을 베어 버릴게 오, 수직선을 찢는 끝 모를 사선처럼 떠나자 당신은 황록색 눈꼽이 고인 흐릿한 눈으로 메리를 만진다 결절이 두두두 돋은 팔꿈치로 철망을 누른다 누렇게 휘어진 송곳니로 싸한 공기를 물어뜯는다 차츰차츰 개집에 들어가는 메마른 얼굴
바람이 분다 쥐똥나무 꽃 그림자가 땅을 뒤흔든다 메리가 점점 기울어진다 발가락 사이에 바람이 생긴다 둘 다 짐승처럼 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그 몸에 갇히지 않고 세상에 편재하느라 당신이 갖지 못 하고
그날 밤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해지지가 않았다
계간 『시와 세계』 2019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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