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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금숙 시인 / 청동여자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9.

나금숙 시인 / 청동여자

 

 

  그 도시의 중심에 가면 표지석이 있다

  수국꽃 아래에서 여자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서고에서 갓 나온 듯 묵은 종이 냄새가 나는 여자였다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잃어버린 언어 몇 개를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넣어둔 지가 언제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디서 샀는지도 모르지만 잃어버린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향기가 우물처럼 고여있는 꽃나무 아래

  등받이 없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았다 가라고 했다

 

  그녀는 내 트렁크 속에

  자신이 잃어버린 언어가 있는지 아주 궁금해 했다

  미래에 올 언어 같다고도 했다

 

  소각장 가는 길을 내게 묻기도 했다

  누가 다 끌어 모아다가 태워버린 것 같다고,

  재가 되었어도 뒤져봐야 한다고 했다

 

  그 도시는 길이 온통 울퉁불퉁해서 낮과 밤, 월요일과 화요일,

  일상적인 시간들이 오가다가 자주 넘어지곤 한다고,

  동전이 주머니에서 튀어나갈 때, 그 언어들도 튀어나갔나 보다고 했다

 

  여자는 실은 죽어가고 있었고

  잃어버린 그 언어들이 자기를 회생시키는 묘약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내가 다시 길을 물으려는데 바람에 주소를 쓴 종이가 날아가 버렸다

 

  나야말로 이 말씀 몇 개를 찾지 않으면

  오십 년 만에 도착한 이 도시에서

  오늘 밤 당장 어디 묵어야 하는지 모른다

 

계간간 『리토피아』 2016년 가을호 발표

 

 


 

나금숙 시인

전남 나주에서 출생.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 나무 아래로』(새로운사람들, 2003)과 『레일라 바래다주기』(시산맥사, 2010)가 있음. 서울시 공무원 역임.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논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