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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얼음 조각(彫刻)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9.

이규리 시인 / 얼음 조각(彫刻)

 

 

  잠시 너의 연인이 되어주기로 한 일

 

  축제는 축제를 견디려 종일 서있었다

 

  음악이 있고

  불빛이 흐르고

 

  하루를 사는 일들이니

  오늘 나는 잘 녹아야 한다

 

  이곳은 녹지 않으려 안간힘 쓰던 내 삶과 얼마나 다를까

 

  꼭 나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네

  잠시를 영원으로 아는 그런 눈먼 사람 말이네

 

  모든 날들인 하루

 

  그래, 하루라는 건 절대 슬픈 시간이 아닌 거야

 

  부재하고 싶었어, 벼랑에서 멸하고 싶었어, 저 실상으로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목이 가늘어지지만

  나는 서서히 녹아야 한다

 

  녹기 위해서 존재하는 삶을 이해하겠니

  카펫을 다 적시며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적막을

 

  투명하다는 건 힘이 될 수 없겠지만

  어떤 패도 지킬 수가 없겠지만

 

  버티어 온 힘으로 사라지는 일

  그러니 다시 고쳐서 말해보자

 

  내가 그때 거기 있었으므로,

 

월간 『시와 표현』 2015년 9월호 발표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과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