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송종규 시인 / 구부린 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2.

송종규 시인 / 구부린 책

 

 

켜켜 햇빛이 차올라 저 나무는 완성되었을 것이다

 

꽃이 피는 순간을 고요히 지켜보던 어린 나방은 마침내 날개를 펴, 공중으로 날아 올랐을 것이다

 

바스러질 듯 하얗게 삭은 세월이 우체국을 세워 올렸을 것이다

숲과 별빛과 물풀들의 기억으로 악어는 헤엄쳐 나가고 행성은 궤도를 그리며 우주를 비행했을 것이다

 

천만 잔의 독배를 마시고 나서 저 책은 완성되었다

 

자, 이제 저 책을 펴자

잎사귀를 펼치듯 저 책을 펼치고 어깨를 구부리듯 저 책을 구기자

 

나무의 비린내와 꽃과 어린 나비가, 악어와 우체통이 꾸역꾸역 게워져 나오는 저 책

 

저 책을 심자

 

저녁의 우주가, 어두운 허공인 내게 환한 손을 가만히 넣어줄 때까지

 

월간 『현대시학』 2015년 3월호 발표

 

 


 

 

송종규 시인 / 방어가 몰려오는 저녁

 

 

별들이 앉았다 간 네 이마가 새벽 강처럼 빛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너를 증명해 보일 수가 있는지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너는 아마, 몇 개의 국경을 넘어서

몇 개의 뻘을 건너서 온 것이 분명하지만

사실은, 우주 밖 어느 별을 거쳐서 왔는지도 모른다

 

지금 허공에 찍힌 빛들의 얼룩 때문에

누군가 조금 두근거리고 누군가 조금 슬퍼져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바닷가를 걷고 있다는 것

우리가 오래 전에 만난 나무들처럼 마주보며 서 있을 때

그때 마침 밤이 왔고, 그때 마침 술이 익었다는 것

 

나는 네 나라로 떠나간 사람의 안부가 궁금하지만

그 나라의 언어가 알고 싶지만

붉어진 눈시울을 들키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술이 익은 항아리 속으로 네가 들어가고 나서, 나는

아주 잠깐 소리 내어 울었던 듯하다

새벽 강처럼 빛나는 저녁의 이마 위에 누군가 걸어놓고 떠난

모자, 만년필, 그리고 저 많은 빛줄기들 그 아래

 

꽃이 핀다, 술이 익는다, 방어가 몰려온다

 

계간 『시와 표현』 2015년 겨울호 발표

 

 


 

송종규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둥지, 1990), 『고요한 입술』(민음사, 1997),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시와반시사, 2003), 『녹슨 방』(민음사, 2006),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민음사, 2015)이 있음. 2005년 대구문학상 과 2011년 제31회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2013년 제3회 웹진『시인광장』 시작품상, 2015년 제13회 애지문학상, 2017년 제10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추인 시인 / 오브제를 사랑한  (0) 2019.12.12
강신애 시인 / 르 클레지오의 바람  (0) 2019.12.12
김연필 시인 / 우산  (0) 2019.12.12
안희연 시인 / 에프트  (0) 2019.12.12
박소란 시인 / 검정  (0) 2019.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