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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추인 시인 / 오브제를 사랑한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2.

김추인 시인 / 오브제를 사랑한

 -매혹을 소묘하다

 

 

바람을 지운다

소리를 지운다

창을 설핏 열어 빛을 소환한다

하오의 잔광이다

동쪽문은 유리의 켄버스

물의 입자들이 캔버스 위에서 응결되는 중이고 보얗게 채색되는 중이고 무거워진 몇 개 물방울들 중력 쪽으로 가파르게 하강하며 긴 발자국을 남긴다 물의 족적, 물의 붓질

켄버스 위 몇 개의 길고 투명한 금줄들은 스크레치 기법일 것이다 샤워실에선 더 촘촘해진 김, 아지랑이

 

시계소리는 화면 밖에서 뚝딱이게 두어라

소녀가 물에서 오고 있으니

 

젖은 살내, 〈타올을 든 소녀〉*쪽으로

쏠리는 펄럭이는 후각들

팔 하나가 불쑥 액자 속으로 들어가 몸을 반쯤 가린 무명 타올을 벗겨내며 빛을 조금 더 불러 앉힌다

전라(全裸)의 소녀

어디선가 휘리릭~ 날아오는 입파람 소리들

 

아니다 역시 설렘은 은밀하고 순연해야.. 과한 것은 금기, 팔에 걸치고 있던 무명 타올을 그녀에게 돌려 준다 무채색으로 일어서는

‘타울을 든 소녀’

아직 더운 김 날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독과 허무의 잿빛, 권옥연의 잿빛은 언제 봐도 눈이 부시다 제 본성의 색감으로 소녀를 감고 도는 추상의 오브제들도 빛난다 움직이는 수증기며 시계소리 그리고 유리를 달리는 물의 발자국들이

세상의 덧칠된 시간을 지우며

존재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절대 미감(美感)의 영속성에 대하여

 

*권옥연 화백의 유화

 

웹진 『시인동네』 2017년 1월호 발표

 

 


 

김추인 시인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등이 있음.  2016년 제9회 한국예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