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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기원 시인 / 죽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2.

강기원 시인 / 죽

 

 

죽집에 간다

홀로, 혹 둘이라도 소곤소곤

죽처럼 조용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을 기다린다

죽은 오래 걸린다 그러나

채근하는 사람은 없다

초본식물처럼 그저 나붓이 앉아

누구나 말 없이 죽을 기다린다

 

조금은 병약한 듯

조금은 체념한 듯

조금은 모자란 듯

조그만 종지에 담겨 나오는 밑반찬처럼

소박한 어깨들

 

죽집의 약속은 없다

죽 앞의 과시는 없다

죽 뒤의 배신도 없을 거라 믿는다

고성이 없고

연기가 없고

원조가 없고

다툼이 없는 죽집

감칠 맛도 자극도 중독도 없는

백자 같은, 백치 같은 죽

 

무엇이든 잘게 썰어져야

형체가 뭉개져야

반죽 같은 죽이 된다

나는 점점 죽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요지를 이빨 사이에 낀 채 긴 트림 하는

생고깃집과 제주흑돼지 오겹살집 사이에

죽은 듯 죽집은 끼어 있다

죽은 후에도 죽은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월간 『유심』 2015년 1월호 발표

 

 


 

강기원 시인

1958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세계사, 2005)와 『바다로 가득 찬 책』(민음사, 2006),『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민음사, 2010)이 있음.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