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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민 시인 / 고스트라이터
1
불광천 근처 연립주택 삼층에 한 청년이 살았다 건물에는 물세를 나눠 내는 사람이 열 명 넘게 거주했지만 그들은 각자 연립한 섬들의 임시 주인이었다 서로에 대해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희석식 소주를 마시며 알코올처럼 풀어지는 흰 달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신화는 없다’ 같은 책을 집필하는 것이 소망이었지만 사실 그는 수년 전 등단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일찌감치 등단을 포기하고 이 업계에서 꽤 알아주는 대필작가가 된 대학 선배 M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그의 유일한 호구지책이었다 그림자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일이었지만 아직은 여린 빛줄기를 좇아야 하는 안개 속 어둠이므로 그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2
만월은 왠지 불길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달은 자주 차올랐다 일거리가 끊겨 부풀어 오른 흰 그늘만큼 그의 몸에는 켜켜이 어둠이 쌓여 갔다
그러다 거물 정치인과 비밀유지각서를 쓰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 밤이면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을 밟고 연립주택 옥상으로 올라갔다
명멸하는 도시의 불빛들 사이로 대낮에는 들리지 않던 노래가 윤슬을 흩뿌리며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호프만의 뱃노래를 흥얼거려 보았다
영혼과 잠시 결별했기에 아름다웠던 순간 그러나 빛의 강물 속에 풀어지는 것이 어둠인지 색깔을 잃어버린 자신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3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는 틈틈이 모아놓은 초록색 공병들과 무가지 더미 옆에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바퀴벌레 몇 마리가 황급히 더듬이를 세우며 현장을 빠져나갔다
유서는 없었다 다만 자신의 죽음이 너무 늦게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달은 이미 만삭의 몸으로 그린하우스 옥상을 넘고 있었다
지구를 벗어나 무중력 공간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시인 K 그가 남긴 빛바랜 시작노트 한켠에는 이런 글귀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산 자가 최초의 작품을 만드는 동안, 온 세상이 고요 속에 잠겨 있는 밤에 생각에 잠긴 유령이 그의 내부에서 깨어나 말한다. 오 공포여!
- 빅토르 위고
웹진 『시인광장』 2019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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