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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미월 시인 / 기차는 달리고 시는 써지지 않고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4.

류미월 시인 / 기차는 달리고 시는 써지지 않고

 

 

기차는 달리고 시는 써지지 않고 사계절 시들지 않을

포도를 따 먹고

시 대신

씨나 뱉는다

 

기차는 달리고 시는 써지지 않고

 

수많은 과수원

이정표 같은 포도 넝쿨은 쿨렁쿨렁 잘도 뻗어 나간다

詩에는 씨알맹이가 없고

 

기차는 달리고 시는 써지지 않는데

 

포도 알에 박힌 깐깐한 포도 씨를 시 대신 뱉고 또 뱉으며

기차는 달리고

시는 왜 이렇게 써지지 않는다

 

포도밭이 끝나는 마을로 기차는 달려가 멈추나?

 

실한 포도나무 나뭇가지 하나 꺾어 내 몸에 접목한 정수리에서

포도송이 거의 다 익어가지만

 

기차는 달리고 시는 써지지 않고

 

신맛 가시지 않아 아직 그대로인 시의 행간에 포도는 넝쿨 뻗고

기차는 달리고 시는 써지지도 않는데

종착역은 다가온다

 

잘 익은 포도를 맘껏 따먹고 차창 밖으로 포도 씨를 힘껏 던져도

죽어라고 시가 씨를 맺지 않는 날

그런 날일수록 무작정

기차를 탄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9월호 발표

 

 


 

류미월 시인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문학 석사. 2014년 《월간문학》 신인상 등단. 저서로는 산문집 『달빛, 소리를 훔치다』(2017)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