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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학성 시인 / 길 위의 生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5.

이학성 시인 / 길 위의 生

 

 

세상 구석구석 그가 안 다녀본 곳은 없다.

여섯 달쯤 그는 머물고 나머지는 떠나가 있다.

그러려고 여기서 미친 듯이 돈을 벌고 지갑에 돈이 떨어져서야 돌아온다.

아직 그가 못 가본 곳은 달 표면의 분화구 정도.

몇 번인가 그가 외지로 끌고 나가려 했지만 거절했다.

생의 환희를 길에서 얻는 부류가 아니며 그럴 시간도 모자랐다.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그는 매번 무언가를 현지에서 부쳐온다.

보풀이 일지 않는 핀란드산 협탁 깔개

알제리의 양털 무릎담요가 그래서 거실의 소유가 되었다.

페루의 코카나뭇잎 몇 묶음과 침보라소 인디오들이

공들여 새긴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조각상도 탁자 구석을 차지했다.

받는 이의 기쁨을 아노라는 듯 양질의 인쇄술을 자랑하는

마인츠의 명화엽서 시리즈며 소년시절 모차르트의 얼굴이 인각된

잘츠부르크산 다크초콜릿도 어김없이 전달되었다.

쉬지 않고 그는 발로 세상을 훑고 다닌다.

떠도는 바람 같은 그를 주저앉힐 순 없다.

석 달 전쯤 이스탄불에서 간행된 신문지로 돌돌 감싼

꾸러미가 도착하며 별안간 소식이 끊겼다.

포장을 끄르자 유리잔 세트와 애플티 상자가 나왔는데

파손되지 않도록 애쓴 배려는 유효했고

온수에 풀어 마시면 농밀한 향에 기분 좋게 감전되리라는

휘갈겨 쓴 쪽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사과차의 향을 음미하며 살펴보니

유리잔 표면에 세 줄기 올리브가지가 상감되어 있다.

그것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기둥을

휘감고 올라갈 기세로 힘차면서도 우아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저 올리브가지를 부리에 물고

두 마리 비둘기가 돌아가야 할 그의 방주方舟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비극적인 대홍수가 들이닥친다 해도 그는 떠날 것이다.

여전히 그를 나무라거나 두둔할 일은 없으며

길은 바깥에 있고 그를 조금씩 철들게 한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9월호 발표

 

 


 

이학성 시인

1961년 경기 안양에서 출생.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여우를 살리기 위해』, 『고요를 잃을 수 없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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