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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분홍 시인 / 조롱에 관하여
광장은 조롱의 서식지, 지친 자들에게 쉽게 날아든다
조롱에 갇힌 새를 보면 새의 발목에 편지를 매달아 이 세상에 없는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아이들의 주머니 끈에 매달려있던 조롱이 내게로 날아온다
단식 농성하는 사람들 앞에서 굶은 사람들을 피자로 조롱하면 조롱이 조롱한 자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간다
기타를 어깨에 멘 자들이 춤추는 광장 조롱이 박수를 친다 조롱을 부추기는 것이 당신의 직업 조롱은 맛있다 한낮의 아스팔트에 녹아내린 피자가 흐물흐물해진다
담장도, 지붕도 없는 곳에서 밤새 꺼지지 않는 달빛을 바닥에 깔고 토막잠 자는 조롱이 열대야 속에서 피어오르는 환각처럼 광장 가득 피어오른다
한동안, 조롱에 갇혔던 아이들이 조롱에서 빠져 나오고 조롱은 유령이 되어 광장을 떠돈다 아직도 조롱을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조롱의 실체를 알고 있다
조롱이 털갈이 할 때, 당신은 꼬리를 자른다 모른척하면 할수록 조롱은 한없이 번식한다
월간 『모던포엠』 2019년 9월호 발표
김분홍 시인 / 저 가방은 출발하는 중인가 돌아가는 중인가
닫힌 지퍼는 입을 열까 지퍼가 입을 열면 닫으라했고 입을 닫으면 열라했던 그녀는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지퍼는 악어 이빨을 가졌지 그녀의 몸에는 지퍼에 물린 자국이 남아 있고 한때 지퍼는 직언하는 독설가였고 자유로운 여행가였지 지퍼 안쪽이 궁금하다면 그건 지퍼의 사생활, 방랑벽 있는 지퍼가 집시의 삶을 두리번거린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지퍼는 묵비권으로 자신의 삶을 방어했으나, 모난 성격은 고립의 원인이 되기도 해서, 닫힌 지퍼는 아무 말도 내뱉지 않을 것이고, 이 빠진 지퍼는 이 빠진 생활을 하겠지
끈에 묶인 그녀는 끈을 믿고 끈에 의지해서 끈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녔지 자궁에서 탯줄이 끊어진 그날부터 누군가를 묶거나 누군가에게 묶여야 안심이 되는 끈에 대한 집착, 아무도 막지 못했지 거미줄 같은 끈을 끊어야 할 때가 오겠지만, 묶이는 끈과 풀리는 끈 사이에서 그녀는 침묵했지 끈끈한 침묵은 무엇이든 걸려들면 먹잇감이 되기 좋았지
끈은 지퍼에게 보내는 최후의 경고이므로 지퍼는 점점 커지는 압박 때문에 여행이라는 말을 봉인하자마자 비밀번호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지 지퍼가 바닥을 보여줄 때 그녀는 끈을 감췄지 처음부터 끈이 없었다는 듯, 마지막까지 끈을 모른다는 듯……
계간 『시산맥』 2019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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