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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시인 / 환타
태어나 본 세상에서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면
못 견디겠다, 기어코 삼킬 테니까
그건 아마 11월에 다섯 시 무렵? 신호등 너머 멀리 보이는 태양이 주홍빛으로 물들었으니까 그 빛을 반사하고 있는 건물의 유리창 한쪽이 아이의 뺨처럼 홍조를 띠며 반짝였으니까
그 때는 아마 아이었을 거야 빨대를 꼽고 아니면 그냥 유리병인 그대로 훌쩍훌쩍 환타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을 테니까 주홍빛 환타병이 투명해지는지도 모르고 붉은 옷을 입고 잠든 채 간절한 붉은 누각의 꿈처럼 세상의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 때는 아마 낙엽이 떨어지고 그 때는 이미 초겨울이고 딱딱한 감들은 오렌지 빛깔로 무럭무럭 익어갔으니까 쉼표처럼 띄엄띄엄 이어지던 시골길의 가로등 아래선 불투명의 아름다운 날숨들이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주황은 어두운 길로 가기 위한 빛으로 찬란했다 붉은 피가 점점 딱딱하게 검은 자국으로 말라가는 것처럼 무언가 바뀌는 중이라고 저녁이 바뀌고 태양이 자라고 하루가 저물고 신호가 곧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주황 언제나 투명한 유리병 속의 환타처럼
그 이름이 좋았다 크리스마스 특선영화에서나 나오는 산타 같이
나는 환타를 마시는데 냄새나는 양말을 걸어놓기도 했는데 주홍빛 감은 흔들리고 수명이 다 된 가로등은 요양원의 할머니처럼 언제나 깜빡거리고 모든 삼킬 수 없는 직전은 왜 항상 저리도 붉거나 또 환타처럼 늘 환상적일까!
그 때는 모든 오래된 것들이 좋아서 붉은 모란 같은 낡은 옛 담요*를 덮고 오래된 동요의 늘어진 테이프를 저녁마다 듣고 오래된 교회의 소녀가 나오는 꿈을 기다리거나 스프에 범벅된 라면부스러기를 먹으며 밤길을 걸었네 그런 내게 환타는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낡은 음료수, 시골 잔칫집에서만큼은 실컷 얻어갈 수 있었던 아름다운 병맛! 그 소화가 되는 맛이라니
데굴데굴 굴러가는 환타 쏟아지는
모든 치명적인 사고들의 기적처럼 주홍빛 잎사귀들의 기침처럼 주홍, 주황, 주홍글씨의 이야기들처럼 환타! 적인 너를 마시는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가로등은 빈 유리병을 바라보며 우듬지에 매달린 까치밥 하나가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달랑, 데구르데구르 굴러가는 낙엽 색깔 하나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칙칙폭폭 붉은 구름 열차를 타고 사막에서 루돌프 낙타를 난타하며 아주 아주 느릿느릿 건너오는 황사바람 같은 아이를 마구 때려서 마구 정다운, 술 취한 산타를 타들어가는 유성의 주홍빛 꼬리를 주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긴, 긴 그림자의 소녀, 여인을, 어머니를, 주름진 할머니의 주홍빛으로 반짝거리는 심장 하나를
톡 쏘는 인생의 어떤 피로 물들어가는 총알 하나를 그리하여 지평선이 지워지는 검은 밤 세상의 모든 새가 검은 새로 변하는 캄캄한 하늘 그 아래 다 자라기 직전의 아이가 부르는 검고 검은 노래를
환타의 목 긴 유리병이 부르짖는 목 타는 초원의 끝없는, 휘이휘이 휘파람 소리를
* 유종인 시, <오래된 담요> '붉은 모란 옛 담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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