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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시인 / 튤립
꽃은 피어나는 게 아니라지요 꽃은 그리는 거라지요 꽃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거라지요 꽃이 여백을 채우면 사라지는 여백도 있는 거라지요 해서 꽃은 소리를 낮추고 최선을 다해 웃음을 그리는 거라지요 낮고 작은 비겁으로 감춰야 하는 참혹이 있는 거라지요 지나쳐 온 자리가 맘에 걸리면 돌아가 다시 그리는 거라지요 그걸 사람들은 계절이라 부르는 거라지요 계절은 반성의 무늬로 건너가는 거라지요 살짝 접어놓은 페이지의 어떤 절망을 일으켜 세우는 거라지요 그건 어둠이 끝없이 펼쳐질 때 빛이 단추를 풀고 쑥 들어오는 거라지요
꽃은 속옷 속으로 들어온 바람을 품고 그리는 그림인 거라지요 꽃이라는 그림은 태어나고 돌아가는 연습인 거라지요
터졌다 맺히고 터졌다 맺히는 허물어져가는 것들의 사랑인 거라지요 사랑은 피어나는 게 아니라 기쁨이 오면 기쁨을 그리는 거라지요 사랑은 지는 게 아니라 슬픔이 오면 슬픔을 그리는 거라지요 그러니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라지요 그러니 땅을 파고 구근을 옮겨 심으면 되는 거라지요
계간 『시산맥』 2019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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