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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영선 시인 / 슬픈 짐승*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8.

정영선 시인 / 슬픈 짐승*

 

 

지하철 계단에 얼굴 묻고 동그랗게 말은 몸에게

먼지 속에 서서 이 먼지, 저 먼지를 쫓아 전단지 내미는 손에게

신발이 편해야 한다는 발의 노래를 들려준 게

오늘 한 일이다

 

채널마다 비추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큰 눈은

물동이를 인 빼빼로 검은 여인은

왜 그리 빨리 마음을 횡단하고 잊히는가

새벽 깬 잠은 왜 이리 오래 마음에 눌러 앉아

한 뼘 잠을 연연해하는가

오늘 한 고민이다

 

검은 털의 짐승에 가슴이 씹힌 걸까

흡혈귀에 피를 빨리면 흡혈귀 되듯

무정에 물려 무정이 된듯

 

꽃으로 눌러 놓은 짐승이 기지개를 켠다

둘레를 유리벽으로 두른 우리에 쪼그리고 앉아

자기애로 말린 공벌레

사람이 그리울 때면 불빛 찾는 염소

두려우면 숨는 생쥐

먹이에 울어대는 하이에나를 본다

 

펼친 기억의 층층 페이지에 활자가 없다

따뜻한 심장

뜨거운 열정인 줄 알았던 건 모두

붉은 꽃에서 빌린 이미지

 

웃음 담은 열기구를 올린 듯 위에서 마구 웃어댄다

 

짐승에 송두리째 먹힌 걸까

 

안에 있는 내가

밖의 짐승을 거울 보듯 본다

 

*모니카 마돈의 소설 제목에서 빌려옴.

 

계간 『모:든 시』 2019년 여름호 발표

 

 


 

정영선 시인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문학동네 2000),『콩에서콩나물까지의 거리』(랜덤하우스, 2007)와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 싶은 곳』(서정시학, 2015)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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