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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빈 시인 / 空(공)
외로운 날엔 방랑을 찾아 나선다
벽에 걸린 조충도에 봄볕을 묻힌 벌나비가 흘러들고 메아리를 편집하던 산까치가 유리창에 비친 산을 부리에 피가 나도록 쪼아대는 공염불 같은 날
창턱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독한 락스에도 빠지지 않는 얼룩을 만진다 조금씩 닳아가는 반지의 안쪽처럼 이 생에서 머물다 갈 공간이 조금씩 위독을 당기고 있다
이가 갈리도록 외로운 심기는 복수초를 피운다
깊은 곳까지 번진 슬픔을 가방에 구겨넣는다 굽높은 구두 손톱물감 입연지 눈썹먹 물크림이나 살결물조차 허용하지 않고 몸에 두른 모양새 모두 벗기고 내장조차도 최대한 무게를 줄인다
방랑으로 가는 길은 꽃술보다 서럽고 학 눈썹보다 고독하고 여승의 뒷모습보다 차가운 퇴화가 구불거리는 곳 보리수나무 그늘 무렵에 멈춰서서 인도 왕자에게 ‘안녕! 싯다르타’라고 빈 안부를 뜨겁게 건넨다 허공을 핥던 새가 짧은 혓바닥으로 눈물을 흘리며 싯다르타에게 노래를 선물하듯
동물성 습을 버리고 식물성 습의 비자를 발급 받아야 한다
식물성 습의 비자 발급을 위한 서류는 달빛보다 둥글게 넓힌 품과 별빛을 찍어 윤이 나게 닦은 마음 한 장이 필요하다
언젠가 바싹 말라죽을 우담바라 싹이 눈알에 돋아나면 눈이 쏟아진다 눈이 추하고 더러운 세상을 하얗게 지우자 텅 빈 공이 보였다
공이란 나라에는 공처럼 둥근종소리로 한 뼘도 안되는 ‘청춘 사용법’을 강의 중이다 수 억 광년의 죽은 시간이 모여 불로장생을 염불 중이다
‘공수래 공수거’ 유통기한 지난 일기예보 같은 말 자신을 텅 비워 꽉 찬 우주를 굴리고 있는 空
웹진 『시인광장』 2019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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